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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도서관

잠자는 숲 속의 그녀들의 비밀, <잠자는 숲>

by 멀티공작소 2009.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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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숲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히가시노 게이고 (현대문학,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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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볼 때마다 저는 늘 양파를 떠 올립니다. 양파는 최후의 마지막 알맹이를 볼려면 계속 껍질을 까 내야 하거든요. 그 사이 사람의 눈은 톡 쏘는 자극을 받게 되지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들이 그렇습니다. 그의 소설은 하나의 사건을 던져 놓고 그 사건을 덮고 있는 껍질들을 하나하나 벗겨내 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드디어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게 되지요. 그 사이 그 껍질들을 손으로 벗겨내고 있는 독자들은 심적 자극을 받게 됩니다. 그 자극은 추리의 결과에 대한 예상 일수도 있고, 등장인물들의 내면에 몰입하는 공감대 일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많은 추리 소설들이 이러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의 특징은 '어떻게?' 의 껍질을 벗겨내는 가에 보다는 '왜 그랬지?' 의 껍질을 벗겨 내는 가에 더 자극이 있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히가시노 게이고 추리소설들의 매력적인 점일 수 있겠죠. 

이제 이야기할 <잠자는 숲> 도 역시 그러한 이야기 구조를 가집니다. 
이 소설은 그의 많은 소설들 중 가가형사 시리즈의 두번째 작품인데요, 그의 소설 <졸업><붉은 손가락><악의> 등의 소설에 가가형사가 사건의 해결사로 등장합니다. 

(다음 부분부터는 스포일러가 조금 있으니 유념해 주세요.)



 

<드가 / 발레연습 (1874)>



<잠자는 숲>은 발레단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들과 그와 관련된 사건 해결의 과정을 이야기로 다루고 있습니다. 제목인 <잠자는 숲>도 발레 공연인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에서 나오게 된 것이죠. 

사건의 발단은 다카야나기 발레단 사무실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에서 시작됩니다. 
하루코라는 발레단의 발레리나가 사무실에 침입한 한 사내를 죽이게 되면서 부터죠. 하루코와 발레단 사람들은 정당방위를 주장합니다. 가가와 다른 동료 형사들이 본 여러 정황들도 정당방위에 가깝죠. 하지만 문제는 동기에 있습니다. 도대체 이 사내가 왜 발레단 사무실 같은 곳에 침입을 한 것일까.
형사들은 그것을 납득하기 위해 수사를 진행 합니다. 하지만 수사는 계속 오리무중에 빠지고 시간은 흘러가는데 설상가상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발레 공연 날, 공연 전 최종 리허설 중에 발레단의 마스터인 가지타가 살해를 당하게 됩니다. 형사들은 더욱 곤혹스런 상황에 빠지죠.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얼마 뒤 야스코라는 발레리나가 자택에서 자살을 한 채 발견되죠. 

제2, 제3 의 시신들이 나오면서 형사들의 수사는 조금씩 사건의 실체에 접근해 가게 됩니다. 살해 수법이 가가형사의 추리로 드러나고, 사건에 얽혀있는 피해자와 가해자들의 비밀들이 하나씩 윤곽을 나타내지요. 그 사건의 이면들이 날빛에 드러나는 순간, 결국 모든 상황이 어떠한 퍼즐 조각들로 맞춰지는지 가가형사는 알게 됩니다. 


발레단의 발레리나들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라면 아마도 발레리나들 끼리의 프리마 발레리나를 향한 과도한 경쟁의식과 욕망이 큰 갈등의 단초를 주리라는 예상을 하게 되겠죠. 하지만 작가는 그 보다는 개개인의 발레리나가 스스로의 발레리나로서의 자존심과 예술적 성공을 위한 강박증에 어떻게 힘겨워 하는지에 더 촛점을 맞춘 듯 합니다. 오히려 발레리나들끼리의 단단한 시스터 후드(Sister hood: 자매애) 가 사건의 혼란을 주는 동기들을 제공하게 되지요.

그 단적인 모습으로 이야기의 주인공인 미오가 뉴욕에서의 일로 가자마와 다툼을 하고 있던 선배 아키코를 보고 "프리마발레리나를 지켜야한다. 지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 마지막 소망조차 깨어지고 만다." (P328) 라는 생각으로 결국 그를 살해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또 하루코는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런 것 밖에 없어. 난 훨씬 더 소중한 것을 너에게서 빼앗고 말았는데." (P339) 하며 자신의 교통사고로 청력을 상실해 가는 미오를 대신해 살인혐의를 쓰게 되는 것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아마도 그런 결속력이 생길 수 있는 것을 작가는 발레계라는 곳을 다루면서 생긴 느낌으로 비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가 생각하는 발레계라는 곳이 "폐쇄된 세계" (P110) 이기 때문이죠. 
소설 속에서는 그런 폐쇄된 세계로서의 발레단이 자주 묘사 됩니다. 
뉴욕에 유학을 가 벌어진 아키코의 외도(?)는 바로 이 사건의 주요 동기로 작용을 하는데 그녀가 그렇게 행동을 하는 이유도 결국 "사랑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세계에 살던 사람" (P295) 인 발레리나이기 때문이며 자살한 야스코가 그렇게 존경하고 사랑하던 발레마스터 가지타를 죽이게 되는 동기도 그러한 폐쇄된 세계의 발레의 속성에 매달리는 연장선상이 있다 할 수 있죠. 

왜 그랬나? 라는 것은 결국 인간들의 동기를 얘기하는 것이니 작가는 발레단이라는 지극히 폐쇄된 한 조직의 얽히고 섥힌 인간 관계의 인과(因果)와 각각의 처한 입장과 심리를 다루고 보여주는데 주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잠자는 숲>에는 조금 독특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 동안 제가 봐왔던 작가의 소설에서는 조금 보기 힘들었던 바로 로맨스죠. 바로 주인공 가가 형사와 발레리나인 미오의 로맨스인데요.
가가 형사 시리즈의 첫 소설이었던 <졸업>에도 그러한 코드들이 나오지만 오히려 이 <잠자는 숲>에서 가가 형사의 로맨스는 더 강도가 있는 느낌입니다. 특히 소설의 맨 라스트는 그러한 절절함이 그대로 묘사되지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에서 그런 장면을 보는 것이 흔치 않은 것이라 조금 의외였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글들은 굉장히 빠른 속도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묘사들은 굉장히 심플하죠. 상황과 행동, 심리를 써 내려가는데에 필요 이상의 깊이는 제거합니다. 그러면서도 할 얘기의 정수는 다 훑어내죠. 그것이 바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 갖고 있는 장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추리 소설들의 많은 부분이 트릭이나 반전에 치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트릭이나 반전의 요소들이 추리소설의 깊은 매력을 느끼게 해주는 것도 맞죠. 하지만 추리소설 역시 인간의 사건을 다루는 것이니 인간의 모습이 빠진다면, 혹 그 부분이 소홀히 다뤄진 채 기계적인 장치에만 공을 들인다면 그 추리소설은 결국 맥빠진 드라마가 될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들은 여전히 매력이 있으며 이 <잠자는 숲>은 그러한 작가의 매력을 알 수 있는 소설로서 무리가 없을 듯 합니다. 아울러 발레라는, 추리소설에서는 좀 보기 힘든 독특한 소재와 이야기 속 발레에 대한 장면들에서 그 매력을 덤으로 느끼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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