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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소설 작업실

[창작 연재 소설] 길에서 만나다 - #8~#12

by 멀티공작소 2018.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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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경찰서를 나와 지하철에 올라타 나는 잠시 물끄러미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웃고, 미소 짓고, 편안하게 졸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문이 열리면 타고 내리며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누군가 모르는 사람이 살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그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나 역시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묘하게도 그 채화연이라는 여자가 살해당해서 죽었다는 말은 내게 왠지 모를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채화연.... 채화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어떤 기억의 흔적에도 떠오르지 않는 이름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녀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의 전화번호를 자신의 일기장에 적어 놓았던 것일까. 그리고 나에게 왜 연락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혹시 그녀는 내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쯤 되는 것일까?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안개 속을 걷는 듯한 기분이다.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이리라....

난 그렇게 결론 내리고 눈을 감았다.

 

  9

 

집 근처 지하철역에 내려서 마을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면서도 난 좀처럼 안정이 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계속 채화연이라는 세 글자만 맴돌았고 이런저런 무의미한 상상만 부풀면서 그럴듯한 공상 스토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아마도 어쩌면 그녀는 나를 짝사랑했었던 -내가 모르는 곳에서 드러나지 않게- 스토커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녀는 다른 번호를 잘못 적었었을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이 컸다. 아니면.... 젠장.

나는 끝없이 밀려오는 그녀에 대한 생각을 몰아내고 싶었다. 나는 결국 좌정하지 못하고 다시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이대로 있으면 아무래도 그 채화연이라는 여자 때문에 머리가 폭발할 듯싶었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멀건이 보고 있자니 아파트 앞까지 이르는 정류장이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고 가뜩이나 혼란스런 머리에 더욱 힘이 빠져 버렸다.

이대로 아파트로 쳐 박힐 걸 생각하니 우울함이 극에 달한 기분이었다.

영화라도 한편 봐야겠군.

난 일단 나의 신경들을 다른 곳으로 좀 이동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10

 

 

내가 사는 지역에는 그럭저럭 쓸만한 영화관이 여럿 있었다. 평소에도 가끔씩 머리를 식히고 싶으면 혼자 찾던 곳이라 익숙하게 표를 끊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저녁때임에도 불구하고 실내에는 사람이 너 댓 정도밖엔 없었다.

나는 이런 분위기를 좋아했다. 어떤 때는 두 세 명 정도만이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본 적도 있었는데 그때 느낌은 꼭 개인의 전용 영화관에 온 기분이었다.

빈 좌석에 많았기 때문에 나는 중앙 쪽으로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아서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곧 스크린에는 본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웅장한 사운드와 함께 예고편이 나왔다. 정신없이 CUT들이 지나가면서 한창 사운드가 고조 되고 있을 때 내가 앉아있는 좌석의 우측으로 누군가가 걸어왔다. 어두워져 있는 실내라 그 사람은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자신의 주위를 잠시 살피며 위치를 가늠하고는 내가 앉아있는 자리에서 약간 떨어진 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힐끔 보아하니 여성같았는데 스크린에서 반사되어 나오는 빛에 비친 얼굴을 보니까 20대 중반쯤의 단발을 한 모습이 정확히 보였다. 혼자 온 듯 일행은 없어 보였다.

별 관심 없이 다시 스크린을 쳐다보고 있는데 이상한 낌새가 들었다. 좀 떨어진 곳에 있던 여자가 한 칸 한 칸 시간간격을 두고 조금씩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되니 난 자꾸 이유를 알 수 없는 찜찜함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마치 무슨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이 굉장히 신경이 쓰였다.

잠시 후, 스크린위로 본 영화가 시작됐고 그녀는 내게서 한 좌석 떨어져있는 옆 좌석까지 접근을 한 상태였다.

조금 더 있다가 실내가 더욱 어두워지자 그녀가 조심스럽게 속삭이듯 내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죄송한데요....”

 

잔뜩 옆으로 신경이 쏠려있던 나는 재빨리 그녀 쪽으로 긴장하며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스크린의 빛으로 희미하게 비쳐졌다.

 

? 저요?”

실례하지만... 혼자 오셨나요?”

.... 그런데요?”

 

그녀는 마치 구원자라도 만난 양 표정이 밝아지더니 바로 내 옆 좌석으로 옮겨왔다. 어쩐지 불쾌감이 엄습했다.

 

그럼 죄송하지만 한 가지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부탁?

 

... 무슨....?”

실은 제가 시력이 좀 나빠서요.... 자막이 잘 안보일 것 같은데 조그맣게 읽어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그녀의 황당한 부탁을 듣고는 잠깐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스크린을 바라보고 다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 태도에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상하게 생각되는 건 알아요.”

아뇨, , 그런 게 아니라....”

 

사실 그랬다.

 

제가 오늘 원래 영화 볼 계획이 아니라서 안경을 안가지고 나왔거든요.”

 

나는 그제야 이해가 돼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주위를 살펴봤다. 물론 아무도 우리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소리를 내게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가 되지 않을까요....?”

 

내말에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웅변하듯 읽어 달라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조그맣게 속삭여 읽어주시면 돼요.”

 

속삭인다, ....

 

그럼..... 그러죠.....”

 

그녀는 스크린으로 시선을 준 채 내게로 살짝 귀가 있는 쪽을 갖다 대었고 나는 주연배우들의 이름부터 계속 진행되는 영화의 자막부터 빠짐없이 최대한 친절하게 -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녀에게 속삭여 주었다. 덕분에 영화의 내용은 하나도 머릿속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저 그녀의 비에 젖은 듯한 머리 결 사이사이에서 풍겨 나오는 향긋한 꽃 내향의 샴푸냄새만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을 뿐.

 

11

 

 

어쨌든.

기묘한 영화감상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자 그녀는 나에게 자막을 읽어 준 보답을 하고 싶어 했다.

 

대단한 일도 아닌데요?”

 

나는 그냥 부담스러워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보답도 그리 대단한 건 아니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요 근처에 잘 아는 기막힌 술집이 있어요. 그리로 가요.”

 

그녀의 뒤를 따라 유흥가 쪽으로 갔다. 가끔씩 오면서도 어디가 어딘지 헤메는 길치인 나와 달리 그녀는 유흥가의 뒷골목을 이리저리 커브를 틀면서 움직이더니만 한 허름한 BAR를 찾아 들어갔다.

주인은 깔끔한 옷차림을 한 30대 정도의 여자였는데 그녀는 나와 같이 온 그녀를 예전부터 잘 아는 사이인 듯 반갑게 인사를 하며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실내의 소박한 인테리어 분위기도 그랬지만 스피커로 나오고 있는 비치 보이스(Beach boys)의 음악이 사람을 스스럼없게 만들어 주는 느낌이었다.

자리에 앉고 주문을 하고나자 ‘Fun Fun Fun' 이 흘러나왔다. 유쾌한 흥이 났다. 집에 박혀서 허접한 상상이나 하는 것보다는 훨씬 기분이 좋아졌다.

 

혼자 영화 보러 자주 가시는 편인가요?”

 

그녀가 물었다.

 

보통은 혼자 가는데요.”

저는 영화는 혼자 가서 봐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것 같아요. 어쩌다가 동행이라도 있으면 이상하게 영화에 집중이 안 되거든요. 옆 사람에게 무관심하게 있어야 하는 순간이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확실히 내 생각도 비슷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까 같은 경우엔 도움이 될 수 있겠죠.”

그러네요.”

 

그녀는 웃었다.

 

저 때문에 당황하지 않으셨어요?”

솔직히 당황하죠..... 영화관에서 그런 부탁을 받는 일이 흔치는 않은 거니까요.”

저도 흔하게 그런 부탁을 한 건 아니에요.”

 

그녀는 또 웃었다. 아마도 웃음이 많은 여자인 듯싶었다.

잠시 후, 주문한 맥주와 안주가 나오자 그녀는 술병을 들어 자신의 잔에다 쭉 따랐다. 내가 가만히 보고 있자 그녀는 나를 힐끗 보고는 덤덤히 말했다.

 

각자 따라서 먹는 주의에요. 자기가 먹을 만큼만.”

편한 대로 하세요.”

 

내가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하자 그녀는 안심한 듯 보였다.

그녀가 술병을 놓자 이번에는 내가 술병을 들고 내 잔에다 따랐다. 맥주의 거품이 일면서 컵 속에 소용돌이가 생겼다 가라앉았다.

 

하지만 건배는 좋아하죠. 유리잔이 쨍 부딪히는 소리가 듣기 좋거든요.”

 

그녀가 내게 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Cheers!"

 

나는 웃으며 그녀와 잔을 부딪치고 천천히 맥주를 마셨다. 시원한 톡 쏘는 느낌이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말씀을 잘하시네요.”

 

그녀가 말했다.

 

제가요?”

 

다른 사람에게 내가 말을 잘한다는 얘기를 듣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하긴 아까부터 그녀와의 대화가 왜 그런지 자연스럽다는 생각은 했었다. 사실 나는 처음 만나는 사람과 그렇게 쉽게 대화가 통하는 타입은 아닌데 그녀에게는 별로 낯가림이 들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얘기하자 그녀는 다시 건배를 청했다. 정말로 건배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선 보통 통성명을 하는 게 제 일 순위겠죠? 서연. 김서연이에요. 내 이름.”

 

좋은 이름이라고 의례적인 칭찬을 하고 나도 내 이름을 말해 주고는 우리는 음악도 듣다가, 이런 저런 얘기도 하면서 금방 술병을 비워 나가고 있었다. 어쩌다가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대한 얘기가 나왔는데 그녀는 그것에 몹시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럼 그 건물에 혼자 계시는 건가요?”

아뇨, 아직 혼자는 아닐 거예요. 처녀귀신도 있고 달걀귀신도 살고 있으니.”

 

그녀는 내 농담에 어이없다는 듯 웃고는 그 아파트에 대한 얘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 이렇다할만한 얘기는 없어요. 20일 후쯤이면 건물은 헐리게 되어있고 지금은 거의 모두가 떠나버린 이를테면 좀 덩치 큰 흉가정도라고 생각하면 될까? 아니면 다세대 흉가?”

 

그녀는 재밌는 듯 웃었다. 나도 미소 지었다. 젊은 여성이 웃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있다는 건 참 즐거운 일인 것이다.

 

그런 곳에서 사는 기분은 어떨까? 밤이 되면 무섭기도 할 것 같고.... 굉장히 흥미가 당기네요.”

동물원 같은 곳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에요. 구경거리 축에도 못 드는.”

 

그래도 그녀는 내가 사는 아파트가 몹시 궁금한 듯한 눈치였다.

 

 

12

 

 

슬슬 시간은 어느덧 자정이 다 돼가고 있었다.

그녀와의 대화는 그럭저럭 흥미롭고 재밌었지만 나에게는 내일까지 끝내야 하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 일어서야 할 때였다.

 

저기... 이제 그만 일어나야겠는데요?”

 

깔깔거리고 있던 그녀는 웃음을 그치고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벌써요? 아직 12시도 안됐는데?”

내일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 그래요....? 그래도 한참 재밌어 지려는데 아쉽네.... 그럼 2차로 가서 소주 한잔만 딱 하고 가요.”

 

나는 좀 난감했다. 낯선 여자와 이렇게 늦도록 술을 먹어보는 게 얼마만인지도 모르게 오래돼나서 껄끄럽기도 했고.

내가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자 그녀는 턱을 괴며 나를 올려봤다.

 

,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네요.”

아뇨, 그런 건 없어요. 하지만.... 서연 씨는 괜찮은가요? 늦어도....?”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까지 이러고 있지도 않았겠죠?”

 

결국 우리는 그 그곳을 나와 감자탕 집으로 가서 소주에 중()짜리 감자탕을 시켜놓고 열띠게 또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그렇게 섞어 먹는 게 나에게는 확실히 쥐약이었다는 것을 그날도 확실히 깨닫게 해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술에 취해 필름이 완전히 끊어져 버렸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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