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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도서관

다시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댄스 댄스 댄스』 – 계속 춤을 추는 것이 중요해

by 멀티공작소 2025.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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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춤을 춰야 해. 그게 무슨 춤이든, 누구와 추든, 음악이 들리지 않아도.”

이전 포스팅한 『노르웨이의 숲』 에 이어 이번엔 『댄스 댄스 댄스』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지금 다시 읽어봐도 이 소설은 여전히 초 현실적 요소와, 하루키 캐릭터들이 갖고 있는 기묘한 유머러스함, 가슴 먹먹해지는 잔상들이 느껴지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어쩐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한 편의 꿈속을 걷는 일과도 같은 느낌입니다.

『댄스 댄스 댄스』는 그런 하루키 문학의 정점 중 하나이자, 현대인의 고독과 상실, 그리고 ‘존재의 희미한 흔들림’을 포스트모던적 시선으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소설의 표면은 부드럽고 매끄럽지만, 그 내면은 유리처럼 깨질 듯한 불안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따라가며 현실을 걷고 있다고 믿지만, 곧 깨닫게 되죠.
이 세계는 너무도 익숙하지만 낯선, '시뮬라크르(복제된 현실)' 로 가득한 ‘가짜의 진짜’ 같습니다.

실체 없는 현실, 그리고 길을 잃은 자아


주인공 ‘나’는 모종의 이유로 사라진 여자 키키를 찾기 위해 삿포로의 돌핀 호텔로 향합니다.
그러나 그곳은 기억 속 과거의 호텔이 아닌, 고급스럽고 차가운 현대식 건물로 재건축되어 있습니다.


이 변화는 단순한 배경의 전환이 아닙니다.
기억과 현실의 불일치, 과거와 현재의 이음새 없음, 그리고 무엇보다 ‘자아의 단절’을 상징합니다.

하루키는 여기서 “나는 누구인가?” 라는 오래된 질문을 다시 던지지만, 그에 대한 답은 없습니다.
‘나’는 흐릿한 인연들과 사건들 속에서 점점 자신을 잃어가며, 그 공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춤을 춥니다.
이건 곧 포스트모던 시대의 인간상이죠.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끝없이 조각나고 재조합되는 유동적 존재라는 것.

현실과 환상, 그 흐릿한 경계


『댄스 댄스 댄스』는 현실과 비현실의 구분이 모호한 세계를 그립니다.
‘양 사나이’ 같은 존재가 말해주는 진실은 신비롭고도 이질적이며, 등장인물들은 말 그대로 ‘이 세계’에 완전히 속하지 않은 듯한 인상을 줍니다.

하루키의 세계는 명확한 설명 없이도 감각으로 이해해야 하는 비논리적 질서 위에 놓여 있어요.
이것은 현대 사회가 잃어버린 감정의 세계를 환상이라는 방식으로 복원하려는 시도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인 서사 구조는 곧 포스트모더니즘이 말하는 ‘절대적 진실의 부재’를 형상화한 것이기도 하고요.

끊어진 서사, 흩어진 삶


이 소설은 사건의 연결고리를 일부러 끊어 놓은 듯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추적하지만 결코 완전히 도달하지 않고,
의문은 풀릴 듯 하면서도 흐릿하게 희미해집니다.



그 느슨한 플롯은 독자에게 혼란을 주지만, 동시에 이것이야말로 현대인의 경험과 가장 닮아 있습니다.
삶은 이야기처럼 정돈되어 있지 않고, 의미는 때로 아무 의미 없이 사라지며, 우리는 답을 찾지 못한 채 다음 페이지를 넘기게 되죠.

이 모든 것이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가 말한 ‘대서사의 해체’,
즉 인류 보편의 진리나 확신이 붕괴된 시대정신과도 정확히 겹쳐집니다.

소비의 시대, 감정의 부재


하루키는 광고, 호텔, 명품, 고급 음식 같은 물질적 요소들을 반복적으로 등장시킵니다.
그것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표면을 상징합니다.



‘나’는 고급 호텔에서 일상을 소비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조차도 순간적이며 소모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포스트모던 자본주의 사회가 인간성을 어떻게 얕고 허약하게 만들어버리는지를 목격하게 됩니다.
진심은 얕아지고, 기억은 상품처럼 소비됩니다.
그리고 남은 건, 텅 빈 마음과 춤처럼 반복되는 일상뿐이죠.

춤이라는 은유 – 멈출 수 없는 존재의 리듬


“계속 춤을 춰야 해.”

이 문장은 단순한 은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소설 전반을 관통하는 하나의 삶의 윤리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답을 찾지 못해도, 의미를 알 수 없어도 우리는 춤을 추듯 살아야 한다는 하루키식 메시지로 느껴지죠.

춤은 곧 ‘지속’이고 ‘의지’이며,
심지어 그 의미 없음 속에서 삶의 형식을 찾아가는 인간의 유일한 몸짓입니다.
그것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인간에게 남겨진 마지막 구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장을 덮은 뒤


『댄스 댄스 댄스』는 답을 주는 소설이 아닙니다.
대신 수많은 질문과 감각, 이미지와 여운을 남깁니다.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장면들,
부유하는 관계들,
그리고 끝없이 반복되는 존재의 리듬.

그 속에서 우리는 문득,
“내가 지금 추고 있는 춤은 어떤 모습일까?”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죠.

삶이란 결국, 음악이 들리지 않아도 계속 춤추는 일 아닐까요?
무대가 현실인지 꿈인지도 모른 채,
그저 몸을 맡기며 흔들리는 리듬을 따라가는 것.
오랜만에 다시 읽어본 『댄스 댄스 댄스』는 그렇게, 여전히,
우리 모두의 삶에 작은 조명을 비추는 것 같은 그런 소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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