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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영화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Bonnie And Clyde, 1967)-그들의 이유 있는 폭주

by 멀티공작소 2009.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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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서 무료하고 공허한 표정으로 알몸을 한 채 뒹굴 거리던 보니 파커(페이 더너웨이)는 집 앞에 세워둔 엄마의 차를 훔치려는 클라이드 베로우(워렌 비티)를 발견하게 됩니다.

영화가 채 시작된 지 몇 분 되지도 않아 우리의 두 주인공은 그렇게 만나죠.

자신의 젊은 삶을 따분한 웨이트리스나 하며 보내던 보니와 갓 출소하자마자 남의 차를 손대는 클라이드. 그렇게 묘한 상황에서 만났지만 두 사람은 곧바로 서로에게 흥미를 느낍니다. 그리고 총과 훔친 차를 가지고 바로 은행을 털기 시작하죠.

1930년 대 미국의 대공황 시절, 실존했던 남녀 2인조 은행 강도는 1967년 만들어진 이 영화 속에서 그렇게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공개된 후 많은 격찬과 히트를 치기도 했지만 영화 <보니 앤 클라이드>는 영화사적으로도 중요한 영화입니다. 바로 이 영화가 1967년 같은 해에 만들어진 <졸업(The Graduate)>, <찬 손의 루크(Cool Hand Luke)>와 더불어 아메리칸 뉴 시네마(American New Cinema)의 명작으로 일컬어지기 때문이죠. (이후에 나오는 작품들에도 많은 명작들이 있지만)


영화는 30년대 대공황에 빠진 미국의 시대적 모습을 많이 보여주죠.

은행에 차압이 들어간 농장, 집에서 쫓겨나는 가족들, 일을 하지 못해 곳곳으로 떠도는 사람들, 가족들. 게다가 털려고 들어간 은행조차도 돈이 없어 빈손으로 나오기도 하는 등, 경제적으로 허물어져 버린 사회모습을 여러 곳에서 보여줍니다. 

그에 비해 보니와 클라이드라는 캐릭터는 어쩐지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의 시대적 느낌을 줍니다. 거침없이 범죄를 저지르고, 공권력에 거리낌 없이 맞서고, 사회에 반항하는 쾌락주의적인 생활방식 등등.

지금 봐도 영화 속 보니와 클라이드의 거침없는 행동은 기묘한 매력을 느끼게 합니다.


스틸이미지 다시 영화의 내용으로 들어가서,

 그렇게 은행 강도 행각에 시동을 건 두 남녀는 클라이드의 형 벅(진 핵크만)과 그의 아내 블랜치, 그리고 정비소에서 만난 CW모스를 자동차 운전담당으로 끌어들여 한 패거리를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미국 곳곳을 주와 주의 경계를 넘어가며 은행들을 털기 시작하죠. 하지만 벌이는 늘 신통치 않습니다. 경제가 바닥을 치는 때에 은행이라고 돈을 쌓아 놓고 있을 리가 없죠.


보니는 보니대로 클라이드와의 남녀관계에 애로가 있습니다. 영화의 초입부터 자신은 여자에겐 관심이 없다고 선언한 -정확히는 그에게 육체적 결함이 있죠. 여자를 안아도 안 된다는- 클라이드로 인해 보니는 가끔씩 성적 갈증의 고통을 겪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나면 의외로 쿨 하게 받아들이는 뉘앙스죠.

어찌 보면 두 사람의 반항적 기질에 이러한 장애가 존재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집니다. 정신적으로는 뜻대로 하지만 육체적으로는 뜻대로 되지가 않는 것이죠. 







 

어쨌든 계속되는 그들의 행각은 신문의 과장기사에 계속 오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언론은 이슈에 집중하며 특유의 썰-을 풀어 놓고 있는 것이라 할까요. 기사를 보며 그들은 비웃죠. 하지도 않은 강도짓에, 과장된 기사내용, 그들은 유명인사가 됩니다.

거기에 기름을 붓는 사건이 생기죠. 현상금이 달린 그들을 잡으러 먼 곳에서 몸소(?) 오신 수사관을 잡아 결박하고 친한 사이처럼 함께 기념사진을 찍어 신문사로 보냅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서서히 종말에 다다릅니다.

그들을 잡으러 온 경찰들과 계속되는 총격전, 부상, 그리고 도주. 간신히 CW모스의 아버지 집에서 부상을 치료하고 재기를 꿈꾸지만 결국은 CW모스의 배신으로 한적한 길가에서 두 사람은 87발의 총알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다른 설명 없이 떠오르는 자막 The end.






 

영화의 도입과 라스트의 끝나는 방식도 그렇지만 아서 펜 감독의 연출적인 시선은 전체적으로 꽤 차가운 느낌입니다. 캐릭터들의 상황은 말할 것도 없이 총격전에서 보이는 액션의 연출과 이야기를 전개하는 편집도 예리하죠. (단칼에 자르고 단번에 붙이는 느낌이랄까...)

단 한번, 영화의 2/3쯤에서 떠도는 생활에 염증을 느낀 보니가 그리워하는 어머니와 만나는 시퀀스는 가족이라는 명사가 주는 느낌 그대로 따스한 시선을 보냅니다. 그러면서도 이 공간은 사막이 연상될만치 메말라 보이죠. 게다가 보니 어머니의 마지막 대사도 그렇고.

 

 

 

라스트에도 비슷합니다. 모텔에서의 총격전 후, 간신히 도망친 두 사람은 언제 은행 강도였냐는 듯 한적한 시골생활을 부상을 치료하며 보내죠. 소풍도 가고. 그곳에서 두 남녀는 최초의 관계도 가집니다. 희열이 있고, 낭만적인 충만함이 있는 듯한 장면이지만 그것은 폭풍전야 같은 불안감을 담고 있습니다. 이유는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총부리가 존재함을 잊지 않게 해주며, 또한 여러 장면들을 배치해 조여 오는 배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긴장이 있기 때문이죠.







 

이렇듯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긴장도를 늘 유지하며 흐릅니다. 마치 폭탄을 들고 달리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그런 긴장은 영화가 만들어지는 시대적 분위기와 많은 유사한 부분들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감독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 - 돌변하는 분위기들, 날카로운 비판, 곳곳에서 부딪치는 가치의 반항과 저항, 그리고 물리적 폭력의 긴장 -을 고스란히 영화 속으로 가지고 간 것이라 할 수 있겠죠.


60년대 말의 오래된 영화이긴 하지만 이 영화에는 많은 텍스트적 요소들이 담겨 있음을 영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손에든 권총, 입술에 문 성냥개비, 감각적인 패션, 찡그린 듯 바라보는 냉소적인 시선. 양손에 권총을 들고 격렬한 총격전을 벌이고 있는 갱스터. (어디선가 많이 익숙한 모습들 아닌가요?)

또한, 이 젊고 아름다우며 도발적인 커플은 신비로운 매력을 가지고 있죠. 특히 페이 더너웨이가 롱스커트를 입은 채 총을 잡고, 쏘고 하는 모습은 너무도 매력적입니다. 수많은 영화의 여자배우들이 이런 비슷한 액션을 하지만 아직까지 이보다 뛰어나게 뇌리에 각인된 배우는 기억이 나지 않네요. 지금도 이 캐릭터들은 끊임없이 변형되어 재생산되고 있으며 당대의 반항아들을 후속으로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영화 속에는 항상 그 시대의 분위기와 시대정신이 은연중에 들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니, 어찌 보면 영화라는 매체는 오히려 그런 것들을 담아내려는 노력이 좀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해줍니다.

젊고, 거칠지만, 이유 있는 반항으로 거침없이 치닫는 한 쌍의 매력적인 커플, 보니 앤 클라이드.

언젠가 한국 영화에서도 그런 캐릭터를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을 가져봅니다.






#. 첨언


1. 영화의 한글제목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원래 일본에서 원제에 붙였던 제목을 그대로 들여와 해석한 것이라는 얘기를 어디서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비슷한 것으로 <내일을 향해 쏴라>도 그렇고. (이 영화의 원제는 <부치 캐시디 앤 선댄스 키드>죠.)

사실이라면 개인적으로 왠지 조금 씁쓸한 느낌입니다. 처음 한글제목을 듣고 원제에 비해 훨 멋진 한글 제목으로 바꿨구나 하는 생각이었거든요. (내일을 향해 쏴라도 그렇고)

2. 라스트에 엄청난 총알 세례를 받는 두 사람의 처절한 씬은 아주 인상적이고 강렬한 장면인데요, 언급한대로 정확히 87발인지 세어보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시나리오에 그렇게 나와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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