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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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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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에 스포일러 있습니다. 유의해 주세요.)
팩션 소설로 유명한 <뿌리 깊은 나무><바람의 화원> 등을 선보였던 이정명 작가의 새로운 소설 <악의 추억>은 전작들과는 달리 현대를 배경으로 일어나는 연쇄 살인사건을 다룬 소설입니다. 그것도 한국이 아닌 침니랜드와 뉴 아일랜드라는 이국적인 공간과 등장하는 캐릭터들도 외국 이름의 인물들이죠. 언뜻 작가명만 없다면 외국소설처럼 보입니다.
전작들에서도 이미 미스터리한 요소들과 스릴 있는 이야기 구성을 역사라는 소재에서 끄집어 낸 작가의 필력과 내공을 충분히 보았기에 이번 연쇄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이 한편의 미스터리 스릴러도 기대를 갖게 됩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한다면 다소 실망을 할 수밖에 없게 되더군요.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일단 내용을 한번 훑어보는 것이 순서겠습니다.
이야기는 침니랜드와 뉴 아일랜드를 연결하는 케이블카에서 일어난 한 여인의 살인사건에서 시작합니다. 현장으로 경찰이 출동하고 라일라 스펜서라는 심리분석관이 등장합니다. 여주인공이죠. 현장감식이 이뤄지고 사체에서는 특이한 특징이 발견됩니다. 바로 ‘웃는 시체’그것이죠.
그리고 바로 다음, 이야기의 남자 주인공 크리스 매코이가 등장합니다. 그 역시 형사인데 그에게는 정신적인 문제가 있어서 현재 정직 상태입니다.
자, 이제 예상대로 수사관으로서의 능력은 출중하지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이 형사가 살인사건에 투입됩니다. 그리고 역시 예상대로 그에게는 제약이 주어지죠. 접근권만 허락되고 심리상담을 받을 것. 상담관은 역시 라일라 스펜서입니다.
이렇게 짜여져 보여 지는 대강의 배경과 설정에서 이미 몇 가지 내용이 그려집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사는 명석한 수사력으로 사건의 실체에 다가갈 것이고 동료 형사들은 그런 그를 못마땅해 하겠죠. 그리고 심리 상담관과는 이런저런 충돌과 협력이 엇갈리면서 벌어질 것이고.
그런 예상을 거의 빗나가는 것 없이 소설의 이야기는 진행이 됩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살인이 이어지면서 여러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에 있었던 일들이 뒤얽힙니다. 이른바 인물들의 각각의 트라우마가 역시 이 소설에서도 중요하게 설정되어 보여 집니다.
이제 이야기 중반 쯤 가면 범인의 윤곽이 독자에게 대강 보입니다. 범인의 정체에는 역시 반전의 코드가 숨겨져 있습니다. 이런 비슷한 종류의 이야기들을 많이 접해본 독자에게는 눈치가 채지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소설이 여러 상투적인 전형성을 가진 설정과 인물들, 대사들, 그리고 장치들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런 류의 소설이나 영화를 즐겨보고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 소설은 그리 신선한 매력을 주지는 못하는 것이죠. 이러한 미스터리 스릴러의 매력이란 것이 읽어가는 재미와 함께 다음 이어질 내용을 예측할 수 없이 빠져 들게 하는 몰입감에 있을 텐데요, 이 소설은 앞서 말한 전형적인 흐름 때문에 읽어가면서 좀 맥이 빠져 버립니다.
특히 소설을 읽으면서 많이 생각나는 것은 영화 <파이트 클럽>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반전 코드가 중요할 수밖에 없는 소설 장르다 보니까 그런 것이라 생각 드는데 소설의 라스트 장면은 정말 <파이트 클럽>의 마지막 장면을 많이 떠 올리게 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전형적’, 또는 ‘상투적’이라는 게 창작에서 꼭 나쁜 것인가. 전형적이고 상투적인 이야기라도, 그 익숙한 설정에서도, 사람은 하나의 서사에서 느끼는 것이 있고, 깊이를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측면에서 이 <악의 추억> 을 생각해 본다면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설정과 장치들은 전형적인지 몰라도 그 깊이에 있어서는 나름 인간의 기억, 또 그 기억의 불완전성에 대하여 집요하게 붙드는 끈기를 보입니다. 그것을 확고하게 이끄는 소설 속 장치가 바로 ‘안개’라는 요소 입니다.
소설의 전반적으로 안개는 중요한 극적장치들을 제공합니다.
우선 시각적으로 안개는 한치 앞을 구분하지 못하는 불투명한 세계를 느끼게 해줍니다. 영화 <미스트(Mist)>에서도 그랬듯 사람의 시신경으로 뭔가를 확실히 식별하지 못하는 안개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의 내면을 갉아먹죠.
소설은 처음부터 그러한 안개의 속성을 암시하면서 시작합니다.
안개는 위험하지도 나쁘지도 않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이 위험할 뿐이다.(p11)
그렇게 시작되는 안개라는 이미지는 시각적으로는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시공간을 늘 뒤덮고 있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또한 매코이의 기억을 은유하는 상징적인 역활도 수행하고 있는 것이죠.
과거 그가 쫓던 연쇄 살인범의 총격에 의해 머릿속에 총알이 박힌 그에게 있어서 그 당시의 기억이라는 것은 늘 안개 속에 있는 풍경같은 모습이고 급기야 그 풍경은 실제의 모습이 아닌 '의사 기억' 이라는 조작으로 이루어진 모습인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안개 속에서 우리가 상상하는 환상, 내지는 그것이 부른 내면의 불확실성이 실체화된 모습 같은 것이죠.
그라는 존재가 기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기억이 그라는 존재를 만드니까요.(p333)
당신의 기억이 당신의 존재니까요.(p333)
라고 소설이 전제하는바 존재로서의 기억이 안개 속에 휩싸여 있는 매코이는 불확실한 안개같은 존재 자체가 될 수밖에 없고 그런 자아는 결국 또 다른 자아 -아주 별개가 아닌 어쩌면 거울같은 반대편의 자아- 를 만들어 낼 수 밖에 없도록 이끄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의 구성과 흐름으로 작가는 인간이란 존재가 갖고 있는 불확실성, 하지만 그 속에서도 소중한 것을 잃지 않기 위해 끝까지 손을 붙잡으려 하는 의지를 말하고 싶었던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희미한 안개 속 세계에 내동댕이 쳐진 인간이라도 스스로에게는 소중한 것이 언제나 존재하니까요. 딸의 존재만은 지키고 싶었던 소설 속 매코이 형사처럼 말이죠.
곱씹어 본다면 <악의 추억>은 인간의 내면 모습을 다룬다는 면에서는 잘 만들어진 소설입니다. 초반에 언급했던 스릴러로서의 전형성을 조금만 더 탈피했다면 하는 아쉬움을 느끼면서 말이죠.
앞으로의 작품을 더 기대해 보겠습니다. 좋은 소설을 목말라하는 한명의 애독자로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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