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 낮에 누군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난 처음으로 초인종 소리를 듣고는 이 낯선 상황에 잠시 우두커니 있었다. 초인종은 신경질적인 낌새를 풍기며 다시 여러 번 울리고 있었다.
나는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처음 보는 낯선 사내가 두툼한 노란 서류철을 펼쳐 들고 무료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오승민씨 댁이죠? 본인이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은 아니었지만.
“이사 날짜는 언제로 정하셨나요?”
사내는 볼펜을 누르고 서류에 기재할 준비를 하면서 물었다. 그런 것을 생각도 못하다가 갑작스레 질문을 당하니 난감했다.
“이사... 요?”
내가 되묻자 사내는 오히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네. 이사를 안 하시니까 저희가 지금 철거를 못하고 있잖습니까? 아직 기한까지 20일 정도 남기는 했는데... 가급적 좀 서둘러 주시면, 저희가 철거 작업을 빨리 들어 갈 수 있으니까요.”
사내는 까다롭게 생긴 외모와는 다르게 아주 친절하고 배려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난 머리만 긁적였다.
“그게... 아직, 이사할 집을 구하지 못해서요.”
내 대답에 사내는 짧게 숨을 뱉었다.
“허어... 빨리 알아 보셔야겠는데요? 만약 기한까지도 집을 비우시지 않으면 관계없이 철거를 강행할 겁니다. 서두르시는 게 좋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사내는 서류에 뭔가 끄적이고는 까딱 목례를 한 후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문을 닫고 들어와 소파에 앉아서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20일 후에 이 건물이 헐린다... 이사를 해야 한다. 이런...
나는 갑작스럽게 알게 된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 아파트가 사라진다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부수고 짓고, 또 부수고 짓고. 사람은 항상 그 짓을 반복한다. 그 이유는 너무나도 천차만별이지만.
다른 곳으로 간다. 이곳을 떠나서. 이 609호를 나간다... 라.
하지만 그 애가 돌아온다면 어떻게 한다? 아니,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 애는 여기로 절대 다시 오지 않는다. 하지만 나 역시 추방당했다가 다시 온 전적이 있지 않았던가.
아파트가 헐린다는 얘기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우선 당장 시급한 일은 다른 거처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휴.
3
책상 앞에 앉았지만 낮에 아파트에 관한 얘기가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아 쉽게 콘티가 짜지지 않았다.
그럭저럭 마감일은 다가오는데 마땅한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고 계속해서 담배만 작살내고 있자니 두뇌 속까지 담배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있는 기분이었다.
물끄러미 하얀 여백의 종이를 보고 있자니 그것은 엄청난 위압감으로 나를 짓눌렀다.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겠다고 집에 선언했을 때 식구들이 보여주던 눈빛도 그렇게 내게 위압감을 줬었다. 그리고는 어찌어찌 학생 때 취미 삼아 그렸었던 만화들을 발판으로 인터넷 웹툰을 그려보고, 또 어찌어찌 사이트에 연재할 기회를 얻어서 그나마 할일이라는 것이 생겼다는 안심은 되었지만 이것도 그리 녹녹한 일은 아니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나는 버릇처럼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연필을 책상위로 툭 던져버렸다.
집중이 안 되는군.
술 생각이 간절했다. 냉장고로 가서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오래된 채소 쪼가리들만 굴러다니고 있을 뿐 맥주는 없었다. 그 꼴을 보니 그제야 나란 인간이 얼마나 비사회적으로 살고 있는지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요 근래 외출이라는 것을 언제 했었던가. 난 도대체 무엇을 만들어 내고 있는 걸까. 비생산적 인간.
한번 머릿속에 떠오른 맥주의 톡 쏘는 시원한 맛이 못 견디게 나의 욕구를 부추기고 있었다.
별 수 없지. 나는 결국 슬리퍼를 신고 껄렁한 옷차림으로 모처럼 만에 외출이라는 것을 했다. 그것도 한밤중에.
4
새벽 1시 10분의 편의점 남자 알바생은 몹시도 무료하다는 표정으로 길게 하품을 해대고 있었다.
나는 이미 사야할 맥주를 카운터에 가져다 놓고 그냥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안주가 뭐가 있을까, 생각하며 스낵 칸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때 편의점 안으로 사복차림의 여고생들이 들어왔다. 그녀들이 여고생이라고 알 수 있었던 건 화장을 했어도 앳돼 보이는 외모와 그녀의 수다들 속에 계속 학원이 어떻고, 쌤이 어떻고 하는 단어들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여고생들은 계속해서 그 영화가 어땠냐느니, 챗에서 만난 녀석과 번개가 어땠었다느니, 인근 고등학교의 얼짱이 누구에게 집적 댔다느니 조잘대며 우르르 컵라면이 있는 쪽으로 가더니 그때부터는 어떤 라면이 좋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여학생 무리 중에 한명은 따로 떨어져 나와 내가 과자를 고르고 있는 칸으로 들어왔다. 그 애와 나는 우연찮게도 시선을 돌리다가 잠깐 눈이 마주쳤다.
빨간 모자를 약간 삐딱하게 눌러 쓴 단발의 그 애는 곧바로 별 관심 없는 듯 과자들을 들쳐보고 있었다. 나 역시 별 감흥 없이 과자를 골라 그 애의 뒤를 지나쳐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야!”
나는 뒤에서 들리는 갑작스런 말소리에 멈춰 서서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거 먹을래?”
그 애는 자신의 친구들 쪽을 향해서 과자를 들어 보이고 있었다. 나는 괜한 오해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그 애가 내 쪽을 돌아다봤다. 나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그 애의 시선을 피해 다시 카운터 쪽으로 가서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걸어갈 때마다 사각거리는 봉지소리를 들으며 편의점 앞에 있는 횡단보도에 다가섰다.
파란 신호를 기다리는 무료함에 담배를 꺼내 피워 무는데 좀 떨어진 옆으로 누군가 다가와 섰다. 바로 조금 전의 편의점에서 본 그 여고생이었다.
그 애를 보면서 난 좀 어색함을 느꼈다. 편의점 쪽을 보니 아직 다른 무리의 여고생들은 모여 있는 듯 했는데 그녀만 이렇게 나와 있는 거였다.
나는 그 애를 잠시 힐끔거리고 보다가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생각하고 다시 신호등을 쳐다봤다.
파란불이 켜지고 내가 천천히 건너편으로 걸어가자 그 애도 내 뒤쪽에서 적당한 간격으로 걷고 있었다. 파란불이 껌벅이면서 빨리 건너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건너편으로 와서 내가 우측으로 방향을 잡는데,
“저기요! 아저씨!”
뒤에서 그 애가 나를 불렀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그 애를 바라보았다. 그 애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면서 얘기를 했다.
“그거 맥주죠?”
그 애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가 든 봉지를 가리켰다.
“그런데?”
“그거 나한테 한 캔만 파실래요?”
뜻밖의 부탁에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39년을 살면서 여고생에게 맥주를 팔면 안 되겠냐는 부탁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잠시 그 애를 쳐다보았다. 그 애는 시큰둥한 표정을 짓더니 내 오른편으로 시선을 향하며 삐딱하게 말했다.
“뭐, 싫으면... 관두세요.”
“아니, 그건 아닌데....”
나는 얼떨결에 봉지에서 맥주를 한 캔 꺼내 그 애에게 건넸다.
그 애는 캔을 받고는 바로 그 자리에서 따더니 벌컥벌컥 마셔대기 시작했다. 깊은 밤이라 행인은 없었지만 여고생이 길가에서 맥주를 들이키는 것을 보고 있자니 불안했다.
“후아- 시원해. 고마워요. 아저씨. 너무 목이 말랐던 참이었는데.”
나는 그녀의 말에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애는 나를 쳐다보며 다시 이번에는 지갑을 꺼내 맥주 값을 내게 건넸다. 그리고 홀짝이며 맥주를 마시더니 입술 주위로 묻은 맥주를 손으로 닦으며 말했다.
“아저씨! 생각이 많은 사람이시네. 그것 때문에 아무래도 조만간 골치 아프신 일에 휘말리실 것 같네요.”
“??”
갑작스런 그 애의 말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내 이런 수법에 걸린 사람들, 대부분 그랬으니까. 잘 마셨었어요.”
그 애는 맥주를 내게 들어보이고는 다시 건너편으로 뛰어갔다. 나는 그 애의 뒷모습을 보면서 잠시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제야 황망한 일이라 생각이 들었다.
맙소사! 미성년자한테 맥주를 건네... 아니 팔았다니!
난 갑작스런 불안함에 주위를 둘어봤다.
뭐... 어쩔 수 없었는건가? 하긴... 미성년자도 취하고 싶은 밤은 있을 수 있는 거니까.
스스로 변명을 해대며 나는 길을 다시 가려고 발걸음을 뗐다. 그때 문득 여학생이 가버린 길을 돌아봤다.
저 애.... 어쩐지 그 애와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다. 그 애도 예언을 곧잘 하곤 했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얘기였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만, 그만하자. 그 애 생각은. 요새 너무 자주 그 애를 생각하고 있다. 별로 좋은 징조가 아니다. 생판 처음 본 저 애도 그렇게 말하지 않나. 골치 아픈 생각은 말자. 그러나 인간의 머릿속 생각이 그렇게 맘먹은 대로 모두 되던가. 또 세상일도 마찬가지다.
재밌는 아이.
나는 방금 전 그 애가 했던 말을 생각하며 길을 걸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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