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이 배달되어 온 것은 몹시도 무더운 한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며칠간의 열대야로 밤에는 사람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숨이 턱턱 막혔고 낮에는 뜨거운 햇살이 살인적으로 내리쬐는 폭염의 연속이었다.
그런 날씨가 계속되는 어느 정오 무렵.
아마도 난 그때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시의 나는 실직 상태로 아내는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내가 가사일을 전담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오늘 잊지 말고 공과금 꼭 내야 돼요. 알았죠?”
“염려 마. 여기에 십계명처럼 새겨놓고 있으니까.....”
아내는 출근하며 냉랭하게 얘기를 했지만 나는 내 머리를 가리키며 농담조로 대답을 했다. 그러나 그런 농담 따위는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한 듯 아내는 여전히 냉담한 표정으로 바람같이 현관을 빠져나갔다. 하긴, 요즘 아내의 얼굴은 거의 저 표정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하지만 난 그런 아내를 여전히 좋아한다. 물론 아내의 잔잔하면서 앙증맞은 미소는 최고라고 할 수 있지만 현실속의 사람은 늘상 웃고만 사는 것은 아니니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물며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것에는 나도 일조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내가 뭐라고 비난을 할 처지는 못 되는 것이다.
설거지를 막 끝내고 아내가 얘기한데로 공과금 고지서들을 챙기고 막 나가려는데 벨이 울렸다.
문을 열었을 때 내 눈에 먼저 띄인 것은 커다란 상자였다.
“무슨 일이시죠?”
“여기가 ..... 씨 댁이 맞습니까?”
내 이름이었다. 확실히.
“네, 맞는데요....”
“택뱁니다.”
사내는 박스를 들이 밀었고 나는 얼떨결에 커다란 박스를 현관으로 들였다. 그리고 사내는 쏜살같이 다시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사라졌다.
현관문을 닫고 잠시 상자를 한바퀴 둘러보고는 보낸 사람이 누군지를 확인해보았지만 상자 주위에는 낙서하나 없이 깨끗하기만 했다.
이게 도대체 뭔 난리람? 택배 온다는 얘긴 없었는데...? 아니, 내 앞으로 온 거라고 했었지? 하지만 물건을 시킨 기억이 없는데...
나는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일단 상자를 들어 집안으로 옮겼다. 상자는 보기보다는 가벼워서 그리 큰 힘이 들지는 않았다.
거실 한가운데로 가져다 놓고 나는 다시 이것을 열어봐도 되는 건지,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잠시 갈등에 휩싸였다.
분명히 이름도 나였고 주소도 정확히 우리 집으로 되어 있는 것이니까 제대로 온 물건인 것만은 확실한 건데 그럼에도 상자를 열어본다는 것이 어쩐지 꼭 무슨 폭탄이라도 들어 있는 것 인양 긴장이 되었다.
좋아..... 어차피 나를 암살한다고 뭐가 달라지는 일은 없으니까 그런 건 아닐 테고, 생각을 하며 묶여있는 끈을 천천히 끌러보았다.
상자를 완전히 벗겨 내고나니 안에는 인형이 들어있었다.
인형?
그렇게 인형과 나와의 첫 만남은 시작됐던 것이다.
난 난감했다.
도대체 누가 이런 것을 보낸 것일까?
혹시나 아내가 나에게 보낸 것인가? 난 문득 생각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아내가 나 몰래 물건을 시켜 온 것일 수도 있지. 내게 선물로? 하지만... 요즘의 우리는 그럴 분위기가... 아니, 어쩌면 서프라이즈 일 수도...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아내가 내게 서프라이즈를 한 게 얼마만인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잠시 인형을 보고 있자니 혹여 마음대로 포장을 뜯어버린 것이 마음에 걸렸다. 혹시 아내가 자기를 위해 구입한 건 아닐까? 그렇다면 문젠데... 아내는 자기에게 온 우편물을 내가 뜯어 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만약 그런 거라면... 이걸 어쩐다? 하지만 내게도 변명의 여지는 있다. 수취인이 내 이름으로 돼있고 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그 정도는 아내도 이해해 줄 것이다.
뭐, 아내가 오면 알게 되겠지.
밤12시쯤 넘어서 아내가 돌아왔다.
“공과금 냈어?”
예상대로 집으로 돌아온 아내는 입가에서 묘한 술 냄새를 풍기며 그것부터 물어왔다.
“어... 뭐...”
“냈어? 안 냈어?”
아내는 내 얼굴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다 냈어.”
아내는 비로소 인상을 풀고는 약간씩 비틀거리며 거실로 걸어갔다.
“저기... 혹시, 택배 시킨 거 있었어?”
“택배?”
아내는 의아한 듯 나를 보고 물었다.
“어.... 낮에 택배가 왔는데...”
“택배라니, 뭐가 왔는데? 어디?”
아내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저쪽 방에 넣어놨어.”
“나한테 온 거라고?”
아내는 방 쪽으로 걸어가며 물었고 난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방으로 들어간 아내가 스위치를 올리자 한켠에 놓인 박스가 보였고 아내는 거침없이 박스를 벗겨냈다. 그리고 인형이 튀어나오자 아내는 이상한 듯 바라봤다.
“이게 뭐야?”
난 아내의 뒤에서 그녀의 어깨너머로 인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인형이야. 당신이 주문한 거 아냐? 새 식구로 말이야.”
아내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를 쏘아봤다. 아마도, 그리고 여전히 내 농담이 맘에 들지 않은가 싶었다.
“도대체 누가 이따위 물건을 보낸 거야?”
아내는 내가 무슨 음모라도 꾸민 것처럼 추궁을 했고 나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몰라, 보낸 사람은 안 써 있고..... 나 역시 주문한적 없고... 그래서 혹시 당신이 주문한 거 아닌가해서.... 아, 아니면, 누군가 당신에게 선물이라도 한 게 아닐까?”
아내는 내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내가 무슨 애야? 이따위의 선물을 받게? 그리고 나에겐 이런 거 선물할 사람이 어디있어?”
“허어, 그럼 뭐지? 주소도 받는 사람 이름도 맞는데..... ”
“당신 혹시 어디서 몰래 사놓고 지금 발뺌 하는 거 아니야?”
아내는 아무래도 날 의심하는 듯 했다.
“설마.... 내가 지금 그럴 처지가 아닌 건 당신도 알잖아?”
내 말하는 표정이 그래도 그나마 진실 되게 보였는지 아내는 더 이상 나를 몰아 부치지는 않고 조용히 방을 나가면서 말했다.
“내일 당장 내다 버려. 생긴 것도 기분 나빠......”
아내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나는 인형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닌 게 아니라 아내의 말을 듣고 보니 어쩐지 인형의 느낌이 그리 썩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크기도 보통 인형과 다르게 어린 아이정도로 컸고, 동화에나 나올듯한 옷이 걸쳐져 있고 얼굴이나 몸도 인간의 몸처럼 꽤 정교하게 되어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잘 느끼지 못했었지만 특히 얼굴은 그 세밀한 정교함 때문에 어쩐지 감정을 지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살아있는 사람같은 인형이라는 게 사람을 더 으스스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방을 나가면서 불을 끄고 다시 인형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 아이가 만약 살아있었다면 저 정도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가 난 고개를 저으며 방문을 닫았다.
그날 오후는 유난히 주위가 조용했다.
나는 소파에 편하게 기대서 스피커로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셜록 홈즈의 추리학’ 이란 책을 읽고 있었다.
셜록 홈즈의 이야기들 속에서 펼쳐지는 여러 모험들을 예로 들면서 각 에피소드마다 어떤 방식으로 추리들을 펼쳤는지 분석적이고 논리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인데 오래전에 사놓고 읽지 않았던 것을 이제서야 꺼내들어 읽고 있었다.
추리.... 확실히 사람들은 날마다 이런저런 추리를 하면서 살아가는 점이 있다. 가정하고 그 가정을 기정사실화하기위한 논리성을 획득하고, 만들기도 하고, 증거를 확보하고....
“범인은 바로 너였어....”
나는 책을 덮으며 말했다. 공허하고 재미없군.
슬슬 점심이라도 차려 먹을까하고 머릿속으로 메뉴를 조합하고 있는데 스피커에서 ‘memory'가 흘러 나왔다
추억.....
내가 처음 사랑에 빠진 여자는 이 노래를 유난히 입에 달고 다녔다. 물론 내가 처음으로 듣게 해준 노래였었지만. 들려 줄때는 바브라 스트라이젠드가 불렀었지만 지금 들리는 것은 사라 브라이트만이다. 사람은 달라도 음악의 느낌은 하나로 치닫는다.
첫사랑......
결국은 파국으로 서로의 가슴속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말았지만 확실히 그 과정은 뭔가의 아련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럴 때 왜 그녀가 떠오르는 것인가?
나는 문득 떠오른 그녀를 잊고자 식사를 준비하고, 세탁기를 돌리고, 집밖을 산책했지만 한번 머리 속에 뭉게뭉게 떠올라 자리 잡은 그녀는 떠날 줄을 몰랐다. 마치 강박증에 시달리는 환자처럼 계속 그녀는 떠올랐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이런....
“난.... 아내를 정말 사랑해.....”
나는 물끄러미 인형을 바라보며 그렇게 입을 열었다.
인형은 이해하는 듯 했다. 아마도 내가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진실이라는 것을 인형은 아는 것이다.
“지금의 아내는 확실히 예전과는 다른 면이 있지만.....그래도 여전히 아내는 좋은 여자야....”
인형은 이 말도 이해하는 듯 했다.
갑작스럽게 인형에게 말을 걸게 된 것은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꾸만 머리 속을 침투하는 첫사랑의 그 여자를 지워버리고 싶었다.
“아내는 다소 세상을 냉소적으로 보는 면은 있지만..... 난 그런 게 너무도 좋았어. 확실히 아내는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많이 가지고 있는 여자거든. 넌 아마 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인형의 얼굴을 뭔가 기대하듯 물끄러미 바라봤다.
인형은 -물론 내 느낌이겠지만-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것(인형)은 이해하고 있었다. 나의 말을 100% 이해하고 있었다.
“지금의 아내랑 결혼한 것을 후회한 적은 단 한번도 없어. 아내를 안는 것은 굉장히 기분 좋은 일이거든. 결혼하기 전에도 그랬지만 결혼한 후에..... 지금도 물론 좋아..... 물론 요즘엔 거의 안아본 적이 없었던 것 같지만 말야..... 그녀는 요즘 꽤 피곤하거든. 일 때문에 말야. 아마 나도 그녀의 피곤함에 일조를 하는 게 있겠지만.”
정말로 아내를 안아본 것이 언제인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생각이 날 듯도 하지만 너무도 막연해서 잘 잡히지가 않는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니 무척 우울한 느낌이 들었다. 세상에 나 혼자 버려진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인형을 보니 그녀 - 레이스가 화려한 치마에 긴 눈썹을 하고 있으니 분명 여자다- 는 몹시도 측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마치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하듯.....
“그만 쓰레기를 버리러 가야겠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모르겠지만 말을 하고나니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난 방으로 들어가 화쓰레기장대 옆에 있는 휴지통의 종량제 봉투를 꺼낸 후 발코니에 놓인 재활용 쓰레기 박스를 함께 들고 아파트 아래로 내려갔다.
쓰레기를 버리는 곳에 종량제 봉투를 놓고 박스에 들은 재활용 쓰레기들을 하나하나 분류해 버리는데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고개를 숙이고 유심히 그것을 보니 수많은 쓰레기더미에 올려져 있는 그것은 아마도 향수케이스처럼 보였다. 그리고 핑크빛의 앙증맞은 리본.
난 가만히 케이스를 쓰레기더미에서 들어 코로 가져가 보았다. 향긋한 꽃내음이 진하게 풍겨났다.
아내가 누군가로부터 선물이라는 것을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잠시 다른 쓰레기더미들의 위에 놓여있는 케이스와 리본을 쳐다보다가 건물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내는 회사에 다니고 있으니까 누구에게든지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회사동료, 거래처 사람, 친구 등등. 나는 가볍게 생각을 하고 엘리베이터 문 앞에 섰다.
그런데 향수라.....
저녁때 나는 몹시 언짢은 기분이 되어 있었다.
출근하면서 아내가 얘기했다.
“이따가 옆집 사람들 보면 얘기 좀 해요. 왜 자꾸 우리 집 앞에다가 자기네 물건을 쌓아 놓는 거야? 도무지 예의라는 게 없는 사람들이라니까....”
나로서는 크게 불편한 것은 없어서 굳이 얘기를 안 하고 있었지만 아내는 그것에 상당히 날카로워 하고 있어서 저녁때 옆집 창문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뭐요?”
나보다는 한 서너 살은 많을 듯한 사내가 문을 열고는 날 빤히 보면서 말했다.
“아, 옆집에 사는 사람인데요.... ”
“근데?”
갑자기 말투가 반말로 바뀌었다.
“네, 저기, 이쪽에 놓으신 것들 좀 치워주시겠습니까? 저희가 다니기가 좀 불편해서요.”
사내는 내말에 별 반응이 없었다.
“둘 데가 없어서 그런 거니 좀 놔두자구.”
“네?”
“이 양반이 귀가 먹었나..... 치울 때 되면 알아서 치울 테니 상관 말란 말야!”
순간 난 화가 치밀었다.
“이보세요, 아저씨.”
“아, 정말 시덥지 않은 거 가지구 귀찮게 구네.”
사내는 오히려 큰소리를 치면서 문을 닫으려 했고 난 닫히는 문을 잡다가 손이 끼고 말았다. 충격에 나는 짧게 비명을 지르며 손을 움켜쥐었고 사내는 주춤하다가 재수 없다는 얼굴로 다시 문을 마저 닫았다.
나는 닫힌 문을 쳐다보았다. 손가락이 시큰거렸다. 순간적으로 머리끝까지 화가 치미는 기분이었지만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옆집에 얘기 안 했어요?”
아내는 인상을 쓰고 말했다.
나는 뭐라고 딱히 할말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금방 치울 거라니까.....”
“지난번에 내가 얘기했을 때도 그런 식이었단 말예요. 그래서 남자가 얘기하면 좀 낫겠다싶어 말하라고 한건데..... 관둬요! 당신보고 말하라고 한 내가 잘못이지.”
아내는 그렇게 말하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샤워를 하는지 물이 쏟아지는 소라가 안에서 들렸고 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 알 수 없는 분노가 내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난 옆집 - 실제로는 거실의 벽이었지만 - 을 쳐다봤다. 그러다가 다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욕실의 문을 쳐다봤다. 나도 모르게 어느 샌가 난 이를 악물고 있었다.
“넌 모르겠지만 세상에는 정말 없어져야 할 인간들이 많아. 난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미워하진 않아. 그렇지만 세상의 별의 별 인간들 중에는 정말 다른 많은 착한 사람들을 위해 사라져야 할 인간들이 무수히 많은 것도 사실이야. 어떤 인간들이냐구? 안하무인격으로 다른 사람들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악의적 인간들이지. 그런 인간들이 있어. 인간들 중에는 말야......”
인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인형을 바라보다가 웃음을 지었다.
“아마 인형의 세계에는 그런 인형은 없겠지. 그런 세계가 부럽다.”
‘어떻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
마치 인형은 나에게 물어보듯 속삭였다, 고 난 느꼈다.
“글쎄..... 없어지는 게 좋겠지..... 다른 선한 인간들을 위해서 말야.”
“여보!”
그때 아내가 주방에서 날 불렀다.
난 아내가 뭐라 하기 전에 재빨리 방의 불을 끄고는 방문을 닫고 나갔다.
“당신 내 화장대 건드렸어요?”
“아니. 내가 뭐 때문에 당신 화장대에 손을 대겠어?
“근데 왜 이렇게 내가 해놓은 대로 안돼 있는 거야?”
“난 당신 화장품들이 어떻게 진열돼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야.”
아내는 날 의심하는 눈초리로 쳐다봤다. 정말이지 난 억울했다. 왜 하지도 않은 일에까지 비난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난 저녁때 굉장히 언짢은 기분이었다.
전날의 그 언짢은 기분은 다음날 아침엔 다른 것으로 바뀌어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난 몹시도 기분이 안 좋았다. 어제 저녁과는 또 다른 묘한 불쾌함. 머릿속도, 몸도 무거웠고 밤새 무슨 악몽에 시달린 것 같기도 했다.
후라이나 만들어야겠다.
아침에 계란 후라이를 만들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자글자글 기름위에서 살아있는 생명인양 톡톡 튀는 흰자와 노른자는 왜 그런지 나의 맘에 쏙 든다.
아내는 평소보다 오늘 일찍 출근을 해야 하는지 무척 서두르고 있었다.
“나 갈게요.”
“아침은?”
난 반숙된 후라이를 접시에 담으며 아내에게 물었다.
“시간 없어요.”
“그럼 가면서 이거라도 먹어.”
난 쨈을 발라놓은 토스트를 내밀었다.
아내는 낚아채 듯 가져가서는 현관으로 움직이더니 신장에서 운동화를 꺼내고는 내가 준 토스트를 베어 물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아내를 보고 있자니 묘하게 활기가 느껴졌다. 기분이 좋았다.
“아얏!”
아내는 운동화를 신다 갑자기 입을 가리며 소릴 질렀다. 난 깜짝 놀랬다.
“왜 그래?”
내가 다가가자 아내는 눈을 크게 뜨고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러자 다물어진 입술사이로 새빨간 피가 솟아나면서 턱으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여보!”
아내는 바닥에 토스트를 확 뱉어냈다. 입에서는 피가 계속 솟아올랐고 바닥으로 핏방울들이 떨어졌다.
휴.
나는 걸레로 현관 바닥에 묻어있는 핏방울들을 닦아내면서 한숨을 쉬었다.
아침부터 한바탕 이게 무슨 난리람. 도대체 쨈을 만드는 회사는 무슨 생각들을 하는 걸까?
물론 내가 부주의 했던 것도 큰 잘못이었다. 아내에게 발라준 토스트의 쨈 속에 유리조각이 있었던 것 이었다. 그 유리조각이 아내의 입술을 찢어놓았다.
난 아내에게 같이 병원에 가자고 말했지만 아내는 가야할 일이 급해서 가는 길에 자기가 알아서 들르겠다고 했다.
별일은 없겠지.
다행히 아내는 유리조각을 삼키지는 않아서 대수롭지 않다고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무슨 급한 일이기에.....
마지막으로 보이는 핏자국을 쓱 닦아냈을 때 그 옆으로 보이는 아내의 구두가 보였다.
구두?
그러고 보니 아내는 아까 운동화를 신고 나갔다. 아내는 회사에 갈 때는 언제나 굽이 높은 저 하이힐을 신었다. 그런데 오늘은 운동화를 신고 나갔다. 정신이 없어서 착각을 한 모양이었다. 난 슬며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내도 역시 급할 땐 그런 실수도 하는 나 같은 사람이었다.
친구인 호석에게서 연락이 온 건 오후 2시쯤 이었다.
오랜만에 서로 연락이 된 거라 우리는 꽤 장시간 통화를 했고 결국 만날 약속까지 잡았다. 생각해보니 술을 마셔 본지도 꽤 예전 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동안 내가 얼마나 사회라는 울타리의 외곽 쪽에서 생활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셈이라고나 할까?
사방이 어둑해질 무렵 난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어차피 술을 마시게 되면 귀가가 늦어질 것 같아서 아내의 핸드폰으로 미리 전화를 하기로 했다.
한참 신호음이 갔지만 웬일인지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결국 회사로 다시 전화를 했다.
“아, 지금 자리에 안계신데요.”
“그래요? 언제쯤 돌아올까요?”
“오늘 월차를 내셔서 오늘은 안 오시구요, 내일 다시 연락하시겠어요? 아니면 휴대폰으로 해 보시는 게.....”
월차?
난 그러마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내는 아침에 나가면서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분명히 여느 때와 똑같이 회사로 가는 걸로 알았는데..... 지각했다고 서둘렀고 그러다가 유리조각을 씹었다, 피를 흘렸고 회사 가는 길에 병원에 들르겠다고 했다.
나는 잠시 곰곰이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다가 시계를 보고 일단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옆집에 사십니까?”
문을 열고 나갔을 때 옆집의 현관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부산한 사람들의 움직임이 들렸다. 그리고 불쑥 안에서 험상 굳은 인상의 사내가 나오면서 나를 보더니 물었다.
“네...”
“혹시 어제 새벽에 옆집에서 뭔가 이상한점 없었습니까?”
“이상한 점이요?”
“네, 이상한점이요. 뭔가 큰소리가 났다거나 비명소리가 났다거나 그런 거요.”
비명소리?
“아뇨, 잠이 깊이 들어서 그런건.... 그런데 무슨 일이죠?”
”아, 저는 경찰입니다. “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는 신분증을 꺼내 내 얼굴로 들이밀어 보여주고는 말했다.
“어제 밤, 이집에서 살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나는 살인이라는 말에 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형사는 예리한 눈초리로 나를 관찰하듯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집주인 남자분이 굉장히 원한을 샀나봅니다. 온몸을 칼로 난도질 당했으니.....”
“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괜찮다면 전 이만..... 약속에 늦어서요. 그럼...”
“한 가지만 더요. 옆집 남자 주인분을 최근에 보신 적 있습니까?”
나는 돌아서려다 멈칫하고는 경찰을 잠시 쳐다봤다.
“..... 아뇨, 별로.....”
“그렇군요. 실례 많았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었다. 그런데 왠지 등 뒤로 날카로운 그 경찰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돌아보고 확인을 할 수는 없었다.
“가끔 연락도 하고 좀 그러지 그랬냐?”
“그러게 말야.”
호석이는 여전히 별로 변한 게 없어 보였다.
고등학교때 있었던 여드름 자국들은 지금은 거의 사라져 있었고 지난번 봤을 때보다 살이 찐 듯 보였다.
“일 그만둔 얘기는 들었는데 새로 시작한거 있어?”
“아직....”
“음, 그래.... 뭐 이왕 쉬는 거니 맘 편히 쉬는 것도 좋겠지. 자, 한잔하자.”
우리는 잔을 부딪쳤다.
맘 편히라..... 그랬다면 오죽이나 좋을 까. 정말 편한 것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우리는 계속해서 이런 저런 사는 얘기들을 하며 소주를 두병 째 비우고 있었다. 호석이는 요즘 아이 키우는 재미에 빠져있는지 계속해서 아이들에 관한 얘기들을 많이 했다.
“너흰 언제 가질 건데?”
“아이? 글쎄.....”
나는 씁쓸히 웃었다.
아이.....
결혼해서 3년후 쯤 이었나..... 아내는 임신을 한 적이 있었다. 여느 부부들처럼 우리 둘도 무척 기뻤었다. 그런 축복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끝내 아이를 가질 수가 없었다. 사고로 아내는 유산을 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그 일이 있은 후로부터 아내와 나는 뭔가 변화가 있었다.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지만 변화는 막을 수가 없었다.
“제수씨는 잘 있지?”
“어, 늘 그렇지 뭐.”
잠시 호석은 내 표정을 살피고는 망설이는 듯 하더니 말했다.
“둘 사이 요즘 어때?”
“둘 사이? 나랑 내 아내?”
“그래. 뭐 별일 없는 거지?”
나는 호석이가 그 얘기를 꺼내는 진의가 잘 파악되지가 않았다.
“뭔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 아냐?”
내가 그렇게 묻자 호석이는 드디어 결심이 섰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사실 오늘 보자고 한 것도 그게 큰 이유였지.”
나는 화장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 변기를 붙잡고 뱃속의 토사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 위가 얼마나 넓은 지는 난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내용물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간신히 위가 안정을 찾고 가라앉은 다음 난 얼굴에 있는 온갖 구멍들로 흘러나오는 마치 진물 같은 액체를 느끼며 변기 안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건 정말로 끔찍한 일이었다.
“물론 난 그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까진 모르겠어. 하지만 내 느낌을 솔직히 말하라고 한다면..... 너 괜찮아?”
머리가 지끈거리고 있었다. 내 눈앞의 시야가 굴곡을 그리고 있었다. 문득 그 그림들 앞으로 아내의 알몸이 떠오른다. 그리고 누군가의 손이 아내의 알몸을 휘어 감고, 쓰다듬고, 은밀한 구석구석을 핥아 내리고 있다. 그건 내손은 아니다. 어디선가 여자의 찢어질 듯한 신음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듯 하다. 다시 눈앞의 그림이 어딘가로 곤두박질친다.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시야가 흔들려 온다.
- 괜찮아?
누군가가 물었다.
- 물론 난 괜찮아. 아니, 한 가지만 빼고 말이야.
- 그게 뭔데?
- 아내, 아내는.... 그럴 리가 없어.
- 아내를 정말로 사랑하는 구나.
- 당연하지. 아내는 내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야.
- 하지만 아내는 널 배신했어. 남자가 있었고. 아마도 깊은 관계의 남자. 당신을 속였어. 당신을 기만했어.
- 아냐.
- 맞아.
- 아냐, 맞아, 아냐, 맞아, 아냐......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모든 것이 사라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눈앞에 보이는 낯익은 벽지에 난 사실 안도를 했다. 날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보게 되는 천장의 벽지. 그렇다, 난 집에 돌아와 있었다.
아직도 머리는 납덩이처럼 무겁고 몸을 움직이기도 벅찼지만 난 그 벽지의 디자인이 그렇게 친근히 보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기분은 영 좋지가 않았다.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어떻게 내가 집에 올 수 있었을까? 뭔가 또 긴 악몽이 내 머릿속을 통과해간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방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서 자고 있었군.
창문 밖으로 햇살이 들어오는지 닫혀있는 커텐은 엄청난 빛을 휘감고 있었다.
옆을 돌아보았다. 침대위에서 아내가 반대편으로 돌아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술에 취하다니.....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아. 아내가 술에 만취한 나에게 얼마나 또 많은 얘기들을 했을까.
시계를 봤다.
어? 당신 늦었어. 출근시간이 늦었다구.
난 몸을 좀더 일으켜 침대로 올라가려 했다. 그때 손에서 뭔가가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을 내려다 봤다.
뭐지?
시야가 뿌옇다. 그런 중에 선홍빛깔이 보였다. 저건 뭐야?
은빛의 물건이 커텐을 여과해서 들어오는 햇빛에 반짝였다. 그건 주방에서 쓰는 칼이었다.
칼?
나는 순간 온몸을 휩싸는 두려움을 느꼈다. 뭐지, 저건 뭐야?
“여보!”
난 손을 떨며 아내의 몸을 천천히 내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난 굳어 버렸다.
아내는 피투성이가 돼있었다. 침대 시트로 붉은 피가 번져있다. 눈을 부릅뜨고 있는 아내는 뭔가 굉장히 놀란 듯 입까지 반쯤 벌리고 있었다.
나는 망연자실 서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나는 머리를 움켜잡았다. 어떻게 된거야? 왜, 왜 당신이 이렇게 있는 거지? 난 다시 내 손을 들어 바라보았다. 내 손에도 온통 피가 묻어 있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필사적으로 난 생각을 했다. 온갖 기억들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내가, 내가? 아냐, 그럴 리가 없다. 아냐, 아니라구.
떠오르지가 않았다.
어떻게 된거지, 어떻게 된거냐구?
또 다시 손을 쳐다봤다. 어떤 감각이 밀려오는 듯 했다. 묵직하고 힘을 가하고 있는, 쑥 밀려가는 감각.
내가 아내를 죽였나? 아냐, 안 죽였어. 아니, 생각해 보면.....죽인 것도 같아. 어제 난 흥분해 있었어. 술에 취해 있었어. 아내는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갖고 있었어. 난 화가 났어. 난 구역질이 났어. 더럽고 추했어. 아내가 날 배신했다고 여겼어. 아내도 날 사랑한다고 생각 했거든. 그게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만취가 된 채 돌아온 난 주방에서 난 칼을 꺼냈어. 아니, 기억이 나지 않아. 하지만 아마 그랬었겠지. 그리고 방으로 들어갔어. 늦은 밤이었을 테니 아내는 자고 있었겠지. 그랬을까? 모르겠어. 기억이 안나..... 그리고 아내를 찔렀겠지. 한번,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아내가..... 비명을 질렀던 것도 같아. 아내의 몸에서 점차 힘이 빠지기 시작했어. 아내의 그 고운 눈빛도 점차 흐려져 갔던 것 같아. 아내는 뭔가 내게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내는 움직이지 않았어. 난 계속 찔렀지. 나도 힘이 빠지고 바닥으로 굴러 떨어 졌어. 아니, 그랬었던 것 같아. 잘 모르겠어. 기억이....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
난 방안에서 뛰쳐나왔다.
거실 소파에 앉아서 정면에 보이는 TV 브라운관을 바라봤다. 내 모습이 거기 있었다. 온통 피투성이 인 채로. 그런데..... 누군가가 옆에 있었다. 누구....?
인형이다.
나는 인형쪽을 쳐다봤다. 인형은 가만히 정면을 응시한 채 미동이 없었다. 당연하잖아? 이건 무생물이야. 생명이 없는 존재라고.
- 내가 그랬나?
- 아마도, 혹은 아닐지도.....
- 아니라고.... 아니라고 말해줄 순 없어?
- 그렇게 할 순 없어. 당신에겐 그런 마음이 있었잖아? 오래전부터.... 당신의 의식 속에.
나는 그렇게 인형과 나란히 앉아있었다. TV브라운관으로 비춰지는 인형은 내 쪽을 쳐다봤다. 그리고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 고마워.....
나의 몸이 점차로 굳어지는 느낌이 든 건 그때였다.
현관문이 열리고 닫혔다. 그리고 복도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 5-6세 쯤 됐을까? 머리가 긴 뒷모습으로 여자애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이는 또박거리는 발소리로 긴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화려한 레이스로 치장한 옷이 유난히 튀어 보였다. 마치 동화속에서 튀어 나온 아이같은 복장이었다.
아이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힐끔 뒤를 돌아보고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괴기스러운, 어쩌면 천진하기도한 그런 미소. 그리고 복도를 꺾어져 아이는 곧 사라졌다.
“아, 미리 얘기를 못했는데 오늘부터 부산으로 3일간 출장이야.”
“그래요? 알았어요. 연락 자주 하세요.”
남편은 차에 올라 아내 쪽을 잠깐 보고는 한숨을 깊게 쉰 뒤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차는 천천히 골목을 빠져나갔다. 멀어져가는 차를 보고 있던 아내는 약간 지친 모습으로 집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거실 창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창 앞에 실루엣으로 보이는 아내가 그 맞은편으로 역시 실루엣으로 보이는 뭔가에게 조용히 말을 건네고 있었다.
“난 남편을 정말로 좋아해. 좀, 무뚝뚝하긴 해도 그건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날 정 말로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거든. 물론 내가 좀더 집안도 좋고 똑똑했다면 좋았을거야..... 그래도 남편은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날 좋아해주거든..... 그런 남편을 난 언제나 믿어...... 내말 이해할 수 있겠니?”
- 난 이해해. 물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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