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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도서관

아트 슈피겔만의 만화 '쥐' - 역사라는 이름의 가족

by 멀티공작소 2009.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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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슈피겔만의 만화 '쥐'는 한쪽으로는 지극히 개인적인 가족사를 내용으로 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나치의 유태인 학살이라는 세계사의 비극을 그려내고 있다.

역사라는 커다란 흐름 안에서 한 가족이라는 것은 지극히 작은 하나의 단위이지만 작가는 역사와 가족사가 별개의 것이 아닌 함께 가는 수레바퀴와 다를바 없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또한 수많은 역사의 사건들이 개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것이 어떻게 사람을 변화시키는지 묘사한다.


부제에도 있듯이 만화는 작가의 아버지가 주인공이다. (즉 그의 아버지 개인의 일대기다)

유태인은 쥐로, 독일인은 고양이로, 미국인은 개로, 프랑스인은 개구리등 동물로 묘사한 만화가의 상상력은 그 이미지에서 연상되는 미묘한 느낌들로 인해 굉장히 위트있게 다가온다.


사실 과거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역사가 있는 한국인으로서 (이 만화와 동일한 시대적 시기) 이 만화에 등장하는 유태인과 독일 나치와의 여러 상황들이나 에피소드는 많은 것들이 겹쳐져 느껴지고 개인적으로 참 시사하는 바가 많다.

전쟁이라는 역사의 비극 속에 휘말릴 수 밖에 없던 그 시기에는 오로지 살아 남아야 한다는 것, 즉 생존이 개개인의 유일한 목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족, 친구, 모든 인간 관계도 그 생존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으면 과감히 버려야 한다는 수많은 잔혹한 상황들은 정말로 비극이다.



<프롤로그에서 나오는 이 장면은 앞으로 벌어질 내용의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책 속의 주인공 블라덱 슈피겔만 역시 그 소용돌이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허나 그는 결국은 수많은 유태인이 죽어간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고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따라줬던 운과 위기를 벗어나는 처세술이 뛰어 났다는 것을 또한 부인할 수가 없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블라덱은 생존을 위한 기지를 발휘한다>


순간 순간 닥쳐오는 위기들에 그는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생존의 처세를 보이지만 그 속에서 점차 피폐해져 가는 아내, 가족, 친구, 자신의 모습들을 겪은 후의 그의 마지막은 결국 살아 남았지만 그닥 행복해 보인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이라고나 할까....



<가족의 비극은 곧 역사의 비극이 아니겠는가...>



아들(이 만화의 작가)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동정을 느끼기도 하고, 때론 거부하기도 하고, 이해를 못하기도 하며, 공감을 표시하기도 한다.

전쟁을 몸소 겪은 세대와 전쟁을 겪지 못한 세대의 괴리가 그려져 있지만 역사라는 이름으로 접점이 찾아지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블라덱은 굉장한 인종차별 주의자다>


만화 '쥐'는 역사의 극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나가면서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들이 있음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그것을 잃었을 때의 후회와 상처를 되새기게 해준다. 역사가 때로는 반복되지만 이러한 비극의 역사가 다시 또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작가의 심정이 녹아있는 듯하다.



<아우슈비츠의 잔혹함>

 

내용도 그렇지만 만화 형식 자체로도 '쥐'는 상당히 특이한 만화다.

선이 비교적 굵은 작가의 그림체나, 상당히 복잡한 그림처럼 보이면서도 흑백의 조화를 이루는 컷들은 여지껏 만화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독특함을 느끼게 해준다. 작가가 콘티를 짜고 한컷 한컷 굉장히 섬세하게 생각하고 다듬어서 완성을 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물론 책 말미에 후기처럼 나오기도 하지만)


1권의 중간에 나오는 '지옥 혹성의 죄수'라는 액자만화는 또 색다른 만화를 보는 경험을 느끼게 해준다. 그림이나 형식도 그렇고 내용 또한 독특해 아트슈피겔만이라는 만화작가의 실험정신을 다시 한번 생각케한다.




<생소한 느낌의 지옥 혹성의 죄수의 한 장면>


'쥐'라는 만화를 보면서 만화라는 매체가 가진 그 다양한 스케일은 역시 한정되는 것이 없다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쥐' 라는 만화는 유태인 학살,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다루기는 했지만 사실 그 관점은 그 비극에 대한 역사적 책임추궁과 비난보다는 인간성이라는 것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객관적인 시점에 더 다가가 있는 듯하다.

그 비인간적 상황을 겪은 유태인에게, 또 아버지를 그렸지만 작가는 그들의 모습조차도 억지로 피해자나 가해자의 모습을 입히기 보다는 솔직한 인간의 모습에 더 촛점을 두는 듯하기 때문이다.

(인간성을 도드라지게 하면서 동물의 외피를 입힌 발상이 이 만화의 재미난 요소라고나 할까!)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가족, 개인은 지극히 자그만 존재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역사를 결국 이끌어가는 것이 누구던가? 그런 자그만 개인들과 가족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개인들과 가족들에게 정말로 인간다운 삶을 줄 수 있는 것이 역사의 책무가 아닐까... 그리고 그러한 역사를 위하여 인간이 인간에게 인간다워야 하는 것이 정말 인간을 위한 진실된 역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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