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어.
그때 발꿈치에 뭔가 부딪치더군. 돌아섰지. 그녀의 머리였어.
나는 내 의지가 아닌 무엇인가에 이끌려 한쪽 무릎을 꿇고 그 머리를 뒤집어 봤어.
눈을 뜨고 있더군. 그 진솔한 연갈색 눈동자.
언제나 활기가 넘치고 굳은 의지가 엿보이던 그 눈동자.
그 속에는 아직도 굳은 의지가 가득했지.
여보게들, 그녀는 나를 보고 있었다네."
앞서 포스팅했었던 <우등생>에서 언급했듯 스티븐 킹의 ‘사계’ 는 제목 그대로 네 편의 중(장?)편 소설로 엮어진 소설집입니다.
이번에는 그 중 가을 편인 ‘스탠 바이 미’와 함께 실린 겨울 편 ‘호흡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호흡법>은 부제(의지의 겨울)가 말해 주듯 분명 인간의 강력한 의지를 소설의 주요 모티브로 삼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불어 그 의지라는 것에 크나큰 동기 부여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모성(母性)이라는 요소죠. 흔히 아는 말로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 가 바로 이 이야기의 주요 테마인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괴기스럽습니다. 그런데 발굴의 이야기꾼인 스티브 킹은 이 괴기스러우며 공포스럽기까지 한 이 이야기를 어느 순간 가슴 먹먹해지는 감동으로 뒤바꿔 놓는 요술을 부립니다.
장편 작업을 끝내고 휴식같이 쓴 소설이라는 작가의 말이 아주 얄밉게 느껴질 정도로 이 소설은 인상적입니다.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시작되는 ‘내가 옛날에 말이야....’ 의 형식으로 시작됩니다. 이런 저런 경험담을 늘어놓는 사교 클럽에서 의사로 일하는 매케런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처음으로 자신의 경험담을 꺼내놓는 것이 시작이죠.
젊은 시절 의사로 개업을 한 매케런의 병원으로 어느 날 샌드라 스탠스필드라는 환자가 찾아오게 됩니다. 이지적인 외모에 당당한 분위기를 가진 그녀는 임신 2개월이었고 미혼모였죠.
그 당시의 시대 분위기상 –어쩌면 지금도 그렇겠지만- 미혼모라는 사회적 인식은 온갖 편견에 가득 찬 시선과 냉대를 받는 터지만 샌드라는 의외로 침착하게 –매케런의 시점에서는- 자신의 상황과 처지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이고 위축되지 않는 그녀의 그런 모습에 매케런은 강한 인상을 받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임산부와 의사의 관계에서 시작된 두 사람은 점차 서로의 인간적 신뢰를 쌓아가는 관계로 발전해 나가게 됩니다. 매케런은 미혼모인 샌드라에게 자신이 연구한 ‘호흡법’ (후에 라마즈 호흡으로 불리는 것과 유사한) 을 가르쳐 주는 등 애정 어린 조언과 관리를 해주고 샌드라는 그녀대로 자신의 아기를 위해 스스로에게 닥친 어려운 현실을 헤쳐나가는 모성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열 달을 채운 샌드라의 태아가 매케런의 손을 거쳐 순탄하게 출산을 맞아 행복한 결말이 이뤄지면 좋겠지만… 그러면 소설은 맥이 빠지겠죠. 아이러니하지만.
결국 크리스마스 이브에 진통을 시작한 샌드라는 집을 나와 택시에 오르고 출산을 위해 매케런의 병원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간 샌드라의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도착한 매케런의 눈앞에서 샌드라는 끔찍한 사고를 겪게 되는데 스티븐 킹의 장기는 바로 이 장면에서 발휘가 됩니다.
스티븐 킹은 이 소설을 통해 아마도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크고 강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 세계의 인과적 법칙을 사정없이 깨버리는 결말의 사건은 그것을 확연하게 보여줍니다. 이 이야기가 강렬하게 시선을 잡아 끄는 이유가 바로 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적 의지를 보여 준다는 점이 아닐까 합니다. 그것도 기괴한 방식으로 말이죠.
흔히 스티븐 킹은 공포 소설의 대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스티븐 킹의 사계’ 라는 제명으로 이름 붙여져 나온 이 소설집에 실린 4개의 소설은 스티븐 킹의 소설가로서의 모습이 단순히 공포 소설이라는 장르로 한정되어지지 않고 좀 더 확장된 소설가로서의 역량을 보여주는 데에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특히나 겨울편의 이 <호흡법>은 본래의 스티븐 킹의 장기를 살리면서도 더욱 진전된 글쓰기의 대가로서의 인상을 확실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스티븐 킹의 소설 속 세계는 늘 기괴함이 넘쳐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인간이 가진 다양한 감정과 그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독자로 하여금 독특한 울림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드는 그의 필력에 다시 한번 경외심을 품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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