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잠이 안와....”
소곤거리듯 들리는 목소리에 잠에 빠져 있던 화연은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불이 꺼진 방안의 어둠 속에서 까만 망막에 비친 두개의 빛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멍해있던 화연은 조금 지나서야 침대 옆에 서있는 조그마한 실루엣이 채린이임을 알아챌 수가 있었다.
화연은 자신의 치렁거리는 머리를 뒤로 넘기며 상체를 일으켰다.
“채린아, 왜 그래?”
“잠이 오지 않아. 엄마.....”
채린이가 조그만 목소리로 힘없이 말하자 화연은 가만히 아이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낮에 잠잤었구나?”
채린이는 빼꼼이 화연을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음, 그럼 왜 잠이 안 올까?”
화연의 표정이 부드러워지면서 채린이를 가만히 쳐다봤다.
채린이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뭔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나..... 엄마랑 같이 자면 안돼?”
“무슨 일이야?”
두 사람의 말소리에 화연의 옆에서 자고 있던 승철이 잠에서 깨어난 듯 눈을 비비며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승철의 목소리가 들리자 채린이는 불안한 눈빛으로 주춤 뒤로 물러섰다.
“아니, 별거 아냐. 채린이가 좀 나쁜 꿈을 꾼 모양이야. 내가 가서 재울 테니까 계속 자요.”
화연은 변명처럼 빠르게 말을 하더니 침대에서 나와 채린이를 번쩍 안아 올렸다.
승철은 잠시 인상을 쓰더니 모로 누운 채 몸을 반대로 돌리고 이불을 끌어 올렸다.
화연은 채린이를 안고 아이의 방으로 향했다.
“엄마, 아저씨는 왜 맨날 우리 집에서 자?”
갑작스런 물음에 화연은 당황한 표정으로 아이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저씨가 채린이랑 엄마를 돌봐주고 싶어 하니까.....”
“아빠가 있잖아.”
화연의 안색이 굳어졌다.
“아빤.... 그러니까....”
두 사람은 천천히 채린의 방으로 들어섰다.
“아빠는..... 이제 다른 돌봐줄 사람이 생겼어. 그래서 채린이랑 엄마를 돌봐주기가 힘들어서 그런 거야.”
화연은 천천히 채린이를 아이용 침대위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불을 쭉 당겨서 아이의 몸 위로 가만히 덮어 주었다.
채린이는 물끄러미 화연을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 말했다.
“아빠는 나랑 엄마가 미워서 떠난 거지?”
“채린아!”
차갑게 화연의 목소리가 나오자 채린이는 이불속으로 얼굴을 반 정도 쏙 집어넣었다.
굳은 표정으로 채린이를 보고 있던 화연의 얼굴이 곧 부드럽게 풀어지며 채린이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그런 생각하면 안돼. 아빠는 채린이를 미워하지 않으셔.”
“그럼 엄마는 미워해?”
채린이의 물음에 화연은 한숨을 내쉬고 잠시 아이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앉아있던 침대에서 일어섰다.
“엄마!”
“그만 자, 채린아.”
“엄마랑 같이 자면 안돼?”
“너 아직도 엄마랑 같이 자면 유치원 친구들이 애기라고 놀려.”
“치!”
화연은 미소를 지었다.
“불끈다?”
그 말에 갑자기 채린이는 기겁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싫어! 엄마! 불 끄지마! 싫어! 싫어!”
화연은 질겁하는 채린이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끄지마? 캄캄한 게 싫어?”
채린이는 불안한 눈빛으로 화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그냥 켜놓을게. 대신 눈감고 자는 거다?”
채린이는 아직도 불안감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화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방을 나가려는데 뒤에서 채린이의 목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불을 끄면.... 빼로가 자꾸 말을 건단 말이야.”
화연은 몸을 돌려 채린을 바라봤다.
“빼로? 그게 뭐지?”
화연의 물음에 채린이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천천히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자신이 누워있는 맞은편에 놓여있는 탁자를 가리켰다. 그리고 탁자위에는 채린이를 향해서 놓여있는 삐에로 인형이 보였다.
화연은 인형을 보고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두 달 전 쯤 채린이의 생일 때 승철이 선물로 사다준 인형이었다. 다소 괴기스럽게 보이기도 해서 채린이는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승철이 큰맘 먹고 한 선물이라 바로 없앨 수는 없어서 방에다 놔둔 거였다.
“빼로는 자꾸 말을 걸면서 날 괴롭혀, 엄마....”
화연은 아이다운 채린의 생각에 미소를 지으면서 다시 침대로 다가가 앉았다.
“좋아! 채린아. 잠이 오지 않으면 양을 세어봐. 채린이 양 좋아하지?”
“응. 나, 양 좋아해.”
“그럼 눈을 감고 양을 세는 거야.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이렇게.”
“그럼 잠이 와?”
“그럼..... 그렇게 양을 세고 있으면 아마 빼로도 말을 걸지 않을 거야.”
“정말?”
“정말.”
채린이는 그제야 환한 얼굴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자, 이제 엄마가 나가면 그렇게 하는 거야?”
“응...”
화연은 일어서서 방문을 나섰다. 그녀의 귀로 조그만 목소리로 양을 세고 있는 채린이의 목소리가 앙증맞게 들렸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양 네 마리.....”
막 도착한 경찰은 자신의 눈앞에 벌어진 끔찍한 광경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농장의 주인인 김씨는 한숨을 내쉬며 넋이 빠진 듯 말했다.
“내 50평생 이런 기가 찬 일은 처음입니다. 내 목숨보다도 더 애지중지 했던 놈들인데....”
이미 김씨의 눈가는 눈물이 가득 고여서 금방이라도 뚝 떨어질 듯 보였고 그 옆의 김씨의 부인은 이미 거의 의식이 나간 모양세로 주저앉아 있었다.
“허, 이것 참.....”
경찰은 이십여 마리의 양들이 쌓여있는 가까이 다가갔다.
양들의 시체는 육안으로 봐도 너무나 처참했다. 양 한 마리씩 각각의 모두가 칼로 난자가 되어 있었고 여기저기 튀어나온 양들의 내장과 살덩이로 주위는 피범벅이 되어있었다. 비록 인간이 아닌 짐승이기는 했지만 눈앞의 광경은 차마 두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살육의 현장 그 자체였다.
거기다가 양들은 하나같이 눈을 뜬 채 죽어있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뭔가 두렵고 공포로 가득 찬 그런 눈빛들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을 노리고 한 짓일까요?”
경찰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하자 김씨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감도 잡히지가 않습니다.”
“혹시 짐승의 짓은 아닌가요?”
“그렇다면 고기가 없어졌어야 할 텐데... 보시다시피 그런 건 없었습니다. 제가 숫자랑 정확히 세어 봤거든요.”
“제가 봐도 그렇긴 합니다만... 이건 마치... 오로지 갈기갈기 찢어 죽이는 게 목적인 것 같은 모습이네요..... 뭐 이런 일이.... 허어, 이거 참...”
경찰은 난감한 표정을 짓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엄마..... 잠이 안와...”
며칠이 지난 후 갑자기 방으로 들어오며 채린이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승철과 침대에 기대서 키스를 나누고 있던 화연은 채린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채린아!!”
인상을 쓰며 승철과 화연은 채린이를 노려보았고 채린이는 눈치를 보면서 몸을 가늘게 떨었다. 화연은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와 채린의 손목을 낚아채듯 잡고서는 씩씩거리며 끌고 가기 시작했다.
“이런, 니미....”
승철은 기분이 잡쳤다는 듯 옆에 놓여있는 신문을 신경질적으로 펼쳤다.
조그만한 신문의 소제목이 그의 눈으로 들어왔다.
‘전국의 양떼 벌써 150여 마리나 몰살?’
잠시 훑어보던 승철은 관심 없다는 듯 다음 장으로 넘겨버렸다.
“도대체 너 왜 이렇게 엄마 말을 안 듣는 거니?”
화연의 호통에 채린이는 침대위에서 글썽글썽 눈물이 고였다.
“자! 채린아! 그만 자! 어서 자라구!”
“이제 양을 세도 잠이 안 온단 말이야!”
갑자기 항변하듯 말하는 채린의 큰 소리에 화연은 잠시 멍해졌다. 그리고는 곧 훅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타이르듯 아이에게 말했다.
“계속 세면 잠이 와. 엄마가 약속할게. 응? 약속.”
화연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채린이는 입술을 쑥 내밀고는 뾰로통하게 말했다.
“양 세도 잠 안와. 그리구....”
채린이는 불안하게 인형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양을 세도... 이젠 빼로가 또 자꾸 말을 건 단 말이야.”
화연이는 물끄러미 아이를 보고는 울컥 솟아오르는 성질을 가라앉히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채린아, 빼로는... 인형이야. 저건 말을 못해. 빼로가 말을 한다고 생각이 드는 건... 그냥 네가 자꾸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 거야. 그러니까...”
“아냐! 빼로가 그랬단 말이야. 아빠는 채린이가 미워서 떠난 거고, 엄마도 채린이를 미워해서 다른 아저씨랑 자는 거라고!”
채린이가 똑바로 쳐다보며 목소릴 높였다.
화연은 순간 뭔가에 얻어맞은 듯 정신이 멍해졌다.
“그리고 그랬어... 한번만 더 자기 말을 무시하고 안 들으면... 엄마랑 다 죽여 버리겠다고...”
“채린아!”
화연은 버럭 아이의 이름을 부르고는 노려봤다. 순간 채린이는 겁을 먹은 눈으로 울먹였다. 그 모습에 화연은 가슴이 아파와 와락 아이를 안았다. 그리고 아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아냐, 아냐. 그런 거 없어. 채린아. 그건 다 그냥 상상이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런 생각할 필요 없어. 아니, 빼로가 거짓말 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냥 무시해. 무시해도 돼. 엄마가 빼로가 못 그러게 할게.”
“정말...?”
화연은 천천히 아이를 떼어냈다. 그리고 웃었다.
“그래. 엄마 무지 쎄. 그러니까 채린이는 하나도 겁먹을 필요 없어. 알았지?”
채린이는 가만히 화연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채린아, 그럼 이렇게 해봐. 음..... 이제 양을 세지 말고 사람들을 떠올려 봐! 엄마..... 아저씨..... 그리고 유치원 친구들. 미령이... 인경이... 재호... 기린반 아이들 모두. 선생님도. 그리고 세상사람 모-두.”
“....아빠두 돼?”
“....그래, 아빠두 생각하고....”
채린이는 가만히 화연을 보다가 점차 표정이 밝아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연은 손으로 부드럽게 아이의 볼을 쓰다듬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한 사람, 두 사람하고 세면 이젠 잠이 올 거야. 그리구.... 빼로도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을 거야.”
화연은 침대에서 일어서서 방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침대 쪽으로 돌아서서 형광등의 스위치를 끄면서 말했다.
“내일은 엄마가 빼로대신 더 예쁜 다른 인형을 사다줄게.”
“정말?”
“정말. 그리고 빼로는 쓰레기통에 던져 버릴게. 그러니까 푹 자야 돼?”
“응. 엄마도 코- 자.”
채린이는 이불 속에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화연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방문을 닫았다.
방안은 고요한 정적 속에 잠겼다.
채린이는 인형이 놓인 곳을 등진 채 꼭 눈을 감고 있었다.
어둠이 서서히 방안의 곳곳에 물들어 가고 있을 쯤 갑자기 누군가 나지막하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지막하던 목소리는 조금씩 그 세기를 더해 커져갔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서서히 채린의 누워있는 침대 쪽으로 가까워져 갔다. 어느새 창문으로 스며들어오는 달빛에 채린이의 침대로 다가가는 검은 그림자도 더욱 가까워지고 있었다.
채린이는 감은 눈에 잔뜩 힘을 줬다. 아이의 앙증맞은 귓가로 서서히 검은 물체가 다가왔다. 하지만 채린이는 귀를 막지 않았다. 대신 어둠 속에서 눈을 꼭 감은 채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빼로. 니가 자꾸 말을 걸어도 난 셀게 아주, 아주 많아. 약 오르지...?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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