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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소설 작업실

[창작단편소설] 킬러 (Killer)

by 멀티공작소 2011.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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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고궁에는 새하얀 벚꽃 잎들이 눈송이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그 아래로 놓여있는 벤치에 한 60대 정도로 보이는 할머니가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과 따사로운 햇살사이로 간간히 산책을 나온 사람들, 애견을 데리고 나온 사람들, 다정한 연인들 등이 지나치곤 했지만 거의 소음이라는 게 없을 정도로 주위는 조용했다.

그때 어디선가 굴러온 축구공 크기의 노란색 고무공이 할머니의 발쪽으로 와서 ‘툭’ 부딪쳤다.

책을 보고 있던 할머니는 시선을 공쪽으로 두다가 고개를 들어 공이 굴러온 방향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는 건장한 체격의 짙은 선글라스를 낀 사내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할머니는 웃으며 책을 덮고는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케이?

“그렇소.

 

사내는 사무적인 얼굴로 벤치에 걸어와 할머니 옆쪽으로 앉았다.
할머니는 사내를 바라봤다. 사내의 얼굴은 어디서나 흔히 만날 수 있을 듯 한 평범한 외모였다. 그녀는 이 상황이 재밌는 듯 싱긋 웃었다.

 

“인상이 좋으시군요.

“고맙소.

 

짤막한 대답에 할머니는 살며시 주위를 둘러봤다.


 

“이곳, 맘에 드나요?

“음, 조용하고, 평화롭고. 사실 나도 이런 곳을 좋아하는 편이지.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할머니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한쪽에 놓여있는 가방에서 작은 CD를 꺼내서 사내에게 건네주었다.

 

“그 사람에 대한 인적 사항이 들어있어요.

 

사내는 CD를 받아 자신의 주머니에 갖다 댔다. 그러자 CD는 소리도 없이 주머니로 빨려 들어 사라졌다. 그런 후 사내는 허공에 키보드를 두드리는 듯 한 손동작을 잠시하고는 할머니에게 말했다.

 

“약속한 계좌로 돈을 보내주면 곧바로 실행에 들어가도록 하겠소.

“조금 전에 넣었으니 확인해 보세요. 최대한 빨리 해주세요. 그 작자랑 같은 하늘아래서 같은 공기로 숨을 쉬고 있다는 생각만 해도 쌍욕이 튀어 나오니까.

 

할머니는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꽤나 미워하시는 군.

 

사내가 말하자 할머니는 눈을 흘겨 뜨며 말했다.



 

“그 자식은 위선자에 이기주의자니까요. 그런 인간과 한때나마 관계를 맺었다는 게 수치스러워요. 나머지 금액은 언제 넣으면 되죠?

 

사내는 자신의 앞쪽에 있는 꽃들을 기분 좋은 듯 바라보며 말했다.

 

“일이 끝난 후 바로 보내주면 되겠소.

“일이 끝난 건 어떻게 아나요? 또 이렇게 만나야 하나요?

“자연히 알게 될 거요. 매스컴에 기사가 뜰 테니까.

"그렇겠군요."
 

그들은 그대로 벤치에 나란히 앉아 몇 마디 더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잠시 후 할머니가 일어섰다.

 

“그럼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겠어요. 행운을 빌어요.

 

할머니는 천천히 뒷모습을 보이며 지팡이를 짚으며 사내에게서 멀어져 갔다.
사내는 잠시 주위를 들러보고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좋은 곳이군. 2010년의 창경궁이라..... 나중에도 종종 이용해야겠어.

 

그런 후 사내의 모습은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시뮬레이션 채팅룸(simulation chatting room)에서 나오면서 케이는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서 의뢰인을 만나는 것은 그에게 꽤 흥미로운 일이었다. 실로 다양한 모습들로 자신들의 진짜 모습을 감추고 나타나 대화를 나누지만 케이는 대부분 어떤 부류의 사람이고 연령대가 어떻게 되는지 감지 할 수 있었다.
조금 전 그 할머니 의뢰인도 20대의 여자 일 것이라 생각했다. 외형은 바꿀 수 있어도 말투는 바꾸지 못했으니.

어쨌든 시뮬레이션 채팅룸은 케이에게 있어서 의뢰인에게 신뢰를 줄 수 있다는 측면에서 매우 유용한 도구였다. 서로의 모습을 바꾸기는 하지만 그래도 얼굴을 대면하고 직접 대화를 나누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케이는 앞으로의 작업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다.

이상진. 38. 성형외과 전문의. 가족사항은 아내와 딸 하나. 그 외에 사는 곳이며 병원의 위치 등의 정보도 그녀가 건넨 CD에 데이터가 상세하게 담겨 있었다.

그렇게 어려운 작업은 아니다, 고 케이는 생각했다.

때때로 정치적 거물이며, 암흑가의 거물들도 작업을 한 경험이 있었던 케이로서는 이번 작업은 비교적 수월하리라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다른 작업들보다도 단순하다고 해야 할까. 케이는 피크닉정도로 이번 작업을 판단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쉬운 일일수록 예상치 못했던 돌발 상황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케이는 프로답게 나태해 지려는 자신을 추스르고는 어딘가로 향했다.

 

 

 


 

침대에 누워서 상진은 길게 담배 연기를 뿜었다. 조금 전 온몸을 불태웠던 섹스의 여운이 니코틴과 함께 혈관 속을 순환해 가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몽롱함이다.

 

“후후,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음, 기분 좋은 일이 많이 생겼거든.

“어떤 일?

“이번에 발표한 논문이 상을 받게 됐다는 거지.

“와우! 축하해요!

 

상진은 그녀를 힐끗 보고는 씩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상진을 엎드려 있던 그녀를 돌려 눕히고는 다시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갔다.

 

“드디어 당신과 한 침대에 눕게 된 거....

 

두 사람은 키스를 나누고는 서로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점차 숨소리가 고조가 되어가는 순간 그녀의 가슴을 움켜쥔 상진의 손을 그녀가 가만히 잡았다.

“오늘 연희를 만났어요.



연희라는 이름에 상진은 온몸이 싸늘해짐을 느꼈다. 그는 인상을 구겼다.


“갑자기 걔 얘기는 왜 해? 기분 잡치게.

“그 애, 당신을 죽이려고 해요.

“뭐?

 

상진은 말문이 막혔다.

 

“어이가 없군.

“걔, 진짜로 일을 벌이려고 하고 있어요. 듣기론 살인청부업자를 쓴다고 했어요. 케이라는 킬러.

 

상진은 생각보다 심각한 얘기라고 느끼고는 그녀의 몸에서 내려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날 죽이기 위해 킬러를 고용한다 그 말이군.

“맞아요. 정확히.

 

 

 

 

상진은 집으로 돌아가는 차 속에서 웃음을 지었다.

연희는 상진이 예전에 관계를 맺었던 여자였다. 그녀는 어땠었는지 모르지만 상진에게


 

있어서 그녀는 사랑의 상대는 아니었다. 그저 권태로운 시기에 흥미로운 관계의 대상을 만난 거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것도 곧 시들해졌다. 그 이유는 바로 지금 만나고 있는 연희의 친구인 미나가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연희 그녀가 상진에 대해 굉장히 진지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 자체가 큰 부담인 것도 있었다. 그녀는 정말로 상진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간신히 떼어 내고 미나와 새로운 시작을 하고 있는 마당에...

제깟 게 머리 굴려 봤자지.

킬러라고? 케이? , 킬러(killer)의 첫 글자인가. , 맘대로 해보시지. 이미 대비하고 있었으니 무서울 건 없다. 이미 집도 자동 경보시스템부터 개인 경호원까지 배치를 해 놨다. 그놈은 아마 내 주변으로 얼씬도 못 할걸.

그러면서 상진은 요즘 외출도 삼가고 병원과 집만을 오가고 있었다. 미나도 그 이후로 본지가 꽤 됐다.

조금만 참아야지. 곧 괜찮아 질 테니.

상진은 천천히 차고로 들어가면서 자신을 위로했다.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향하면서 상진의 시야로 배치돼 있는 두 명의 경호원이 보였다. 집으로 들어오는 낯선 사람은 누구든지 그들의 철저한 검문을 받도록 되어있다.
그는 웃음을 지었다. 집에 있을 때만은 최고로 안전하지.

상진이 막 현관문으로 들어서려고 할 때 대문 쪽에서 딸아이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딸아이는 친구와 함께 경호원 앞을 지나쳐 상진 쪽으로 다가왔다.

 

“아빠, 다녀오셨어요?

“음, 그래? 친구니?

“응. 인사해 우리 아빠.

“안녕하세요?

“음, 그래. 예쁘게 생겼구나.

 

딸의 친구는 그 말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엄마한테 맛있는 거  만들어 달라고 해. 그리고 아빠는 할일이 좀 있으니까 조용히 놀아야 돼?

“응.

 

딸아이는 친구의 손을 잡고 후다닥 안으로 들어갔다.

초등학교 4학년인 딸아이는 그에게 늘 가장으로서의 신선함을 줬다. 비록 외도를 하면서도 딸아이만은 끔찍하게 아끼는 상진이었다.

 

 

 

 

상진은 편안한 옷차림으로 서재에서 다음 발표할 논문의 자료들을 검토하고 있었다.




한참 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상진은 문득 입구에 인기척을 느끼고는 쳐다봤다. 딸아이 친구가 손에 쟁반을 들고 입구에 서있었다. 쟁반에는 과일과 음료수가 올려 있었다.

 

“아줌마가 갖다드리라고 해서요.

“오, 그래. 고맙다.

 

소녀는 상진 쪽으로 걸어와 책상위에 쟁반을 올려놓았다. 쟁반을 내려놓는 소녀의 손에 뭔가 다른 것이 보였다. 장난감 총이었다.

 

“여자아이가 총을 갖고 노는 구나?

“총을 좋아해요. 이것저것 수집도 많이 하죠.

 

소녀는 상진에게 불쑥 총을 내밀었다. 상진은 씩 웃으며 총을 받았다. 장난감 총이었지만 꽤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울긋불긋한 원색적인 색깔이며 기묘한 모양 등은 아동용으로 제작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여자아이라면 이런 거 보다는 인형을 갖고 노는 게 좋지 않겠니? 여자답게.....

 

상진은 소녀에게 다시 총을 건네면서 말했다. 소녀는 상진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해요. 하지만...

 




소녀의 눈빛이 묘하게 빛을 냈다.

 

“일할 땐 다르죠.

“일?

“최연희씨의 메시지입니다. 당신은 끝났어. 잘가, 내 사랑. 

 

소녀는 총을 쳐들면서 낮고 빠르게 말했다.

상진의 눈동자가 커졌다. 소녀의 방아쇠를 쥔 손가락이 거침없이 당겨졌다.

!

한발의 총성이 울리며 상진은 힘없이 의자로 털썩 주저앉았고 옆으로 젖혀진 그의 관자놀이에 난 구멍으로 한 줄기 피가 천천히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소녀는 재빨리 총에 붙어있는 알록달록한 플라스틱들을 떼어내 상의 주머니에 넣고는 총을 상진의 손에 쥐어 줬다. 그리고 숨을 고르면서 사람들이 몰려오면 어떻게 그럴 듯하게 연기를 해야 할 지를 생각했다.
상진은 자신이 방으로 쟁반을 들고 들어오는 순간 총을 쏴 자살을 한 것이다. 이미 총에는 그의 지문만이 묻어 있다. 내 양 손은 특수하게 제작된 고무 피부로 감싸져 있으니까.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어찌할 바 모르는 시늉을 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알아서 자신들의 머릿속으로 각본을 만들어 낼 것이다. 아주 그럴 듯하게 말이다.

케이는 상진의 얼굴을 보았다.

아마도 내 이름을 미리 들었겠지.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걸. 케이는 키드(kid)의 첫 글자라는 것을. 

심호흡을 크게 한 후 곧 케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즐겁게 외쳤다.

 

clear! (상황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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