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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소설 작업실

[자작단편] 동물원 오후의 비

by 멀티공작소 2010.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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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인가 오늘처럼 스산하게 비가 내리던 날에 동물원을 갔던 적이 있었다. 물론 가기 전부터 비가 온 것은 아니다. 제정신이 아니고야 비가 오는데 동물원에 갈 리가 없지 않은가?

그저 하늘은 맑았다 개였다를 반복하면서 심술을 부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깊게 각인된 이미지로서 그날 동물원의 정경은 꽤 인상에 남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때 그곳에서 뭔가 기막힌 사건이 있었다거나 로맨틱한 우연이 있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날의 동물원의 정경, 그것이 오래도록 이상하리만치 기억의 뇌리 속에 박혀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지나간 시간들을 추억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곰곰이 보면 그런 요소들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실제로 별로 튀어보이지도 않았고 재밌어보이지도 않았지만 얼마 후에 그때의 정황들을 떠올려보면 무언가 묵직한 것이 그 안에 담겨 있었음을 알게 되는 것, 그 당시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자각하지 못했었던 그런 것들 말이다.

그날 동물원에서 오후의 한때를 보낸 나에게 분명 그런 것들이 있었다.





동물이나 보러갈까...

베란다에서 문득 담배를 물고 찌푸린 표정인 듯 한 하늘을 바라보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우선 내겐 특별하게 할일이 없었고 무슨 계획을 세운 것도 없었고 누군가 날 찾지도 않았으며 어떤 약속도 어떤 제약도 주어지지 않았던 말 그대로의 자유를 보장받은 하루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떠오른 그때의 나는 지극히 여러 가지 상황이 썩 좋지가 않았을 때였다. 시작하려고 하는 여러 가지 일들이 뜻대로 돌아가지지를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시간이 남아도는 상태였고 평일의 이런 낮 시간에 만날 누군가도 딱히 없었다.

지극히 썰렁할 것 같은 예감의 하루.

도대체 이런 낮 시간에 이렇게 담배를 피우며 머릿속 상태가 멍한 상태로 있는 사람은 몇이나 있을까를 생각하다 그런 그림이 떠올랐던 것이다.

갑작스럽게 동물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니, 그것도 혼자서.

자신이 생각해도 조금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당장 동물을 안보면 안 될 것 같다는 마음이 자꾸 가슴속을 충동질 하고 있었다.

몇 번의 망설임 끝에 결심을 하고는 부랴부랴 씻고 옷을 챙겨 입고 막 문을 나설 때 왠지 혼자서 동물원을 걸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보니 또다시 주저함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혼자 동물원..... 웬 궁상?

하지만 곧 그런 생각은 지워버렸다.

이미 혼자 무엇을 한다는 거에 어느 정도 익숙해 있었던 터였고 그때에 나에게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지 혼자라는 것이 아니였었기 때문에.





평일의 동물원은 예상대로 한산하고 평온했다.

나는 담배를 피워 물고 조잡한 입장권에 그려진 약도를 가끔씩 보고 나는 슬슬 움직이면서 갖가지 동물들을 구경했고 아직은 3월말이라 쌀쌀해서 그런지 대부분의 동물들은 실내우리에 가둬져 있었다.

예상과는 다르게 흔히 있으려니 한 연인들의 모습도 거의 눈에 띄지가 않았다. 하긴 그런 사람들에게 더 이상 동물원이라는 곳은 추억을 쌓을 만한 매력적인 곳은 되지 못할 것이다. 요란한 자극이 있는 곳도 아니고 특별히 사람들의 흥미를 끌만한 것도 없다. 솔직히 코끼리나 사자를 보려고 힘들게 여기까지 온다는 것은 어쩐지 피곤한 일로 여겨 질 거라고 그때는 생각했었다. 보다 더 자극적인 것들이 많이 있으므로.

그러나 난 여기까지 오게 됐다. 단순한 이유다. 별것 아닌 사자나 코끼리가 보고 싶어 온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상으로 나는 인간의 세계가 아닌 가로막힌 동물의 세계가 보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약도대로 쭉 길을 따라 건물로 들어가 온갖 동물들을 빠짐없이 구경했다.

정말 지구에는 너무나 많은 갖가지 동물들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 아닐까?

그런 지구가 내일 당장 멸망하기라도 할 듯 우울한 빛의 하늘은 비극의 전주곡이라도 울리면 그럴 듯 할 것 같았고 주위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조바심어린 인간들의 마음과는 달리 우리속의 동물들은 툭 건드려 보고 싶을 정도로 도인들처럼 평온하기만 했다.

거의 마지막 코스로 접어들 무렵 희미하게 빗방울들이 지면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빗줄기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났고 우산도 안 가져온 나는 별 수 없이 가까운 벤치로 들어갔다. 다행히 지붕이 있어서 벤치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막아주었고 나는 잠시 숨을 내쉬고 벤치에 앉아서 담배를 피워 물고는 비가 조용히 내리는 동물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동물원안은 몹시도 조용했다.

간간히 멀리서 열대새의 울음소리만 메아리 칠뿐 적막함에 휩싸인 동물원안은 마치 문 닫은 후의 동물원안에 와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담배를 한개 피 다 피우고 나서 가야 되는 건가 말아야 되는 건가를 고민하고 있는데 탁탁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내가 있는 옆 벤치 쪽으로 사람이 한명 들어왔다.

갑작스럽게 돌출된 듯 나타난 것은 블루진에 검은 자켓을 걸친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였다.

언뜻 보기에는 첫새벽에 현관문을 열었을 때 쏴하고 들어오는 맑은 공기를 연상케 하는 인상을 지니고 있는 여자였는데 여자는 어깨쯤 오는 머리칼에 맺혀있는 물기를 툭툭 털어내고는 뛰어온 듯 숨을 몰아쉬면서 아직은 계속해서 촉촉한 비가 내리고 있는 하늘을 관찰하듯 살펴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나처럼 한동안 가기는 힘들 것 같다고 여겼는지 옆 벤치에 앉아서 내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위에 사람하나 안보이고 이런 경우 나는 몹시 긴장을 하게 된다.

꼭 무슨 일이 벌어져서가 아니라 내 주위를 감싸는 공기가 타인과의 동 공간에 놓이게 됨으로 묘하게 탁해지는 듯한 답답함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애써 옆 사람의 존재를 잊으려고 다시 담뱃갑에서 담배를 한개 피 꺼내는데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내가 그녀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녀는 마치 어려운 수학문제지를 앞에 두고 고민하는 소녀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저도 담배 한개 피 주실 수 있을까요?”


평일의 오후에 동물원에서 여자에게 담배를 한개 피 건네주는 기분은 참 묘한 것이지만 나는 이렇다 얘기 않고 담배를 건넸고 친절하게 불까지 붙여 주었다.

그녀는 깊게 담배를 빨아들였고 조용한속에서 담배 타들어가는 소리까지 귀에 들려왔다.


“비가 금방 그칠까요?”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여자의 말에 뭐라 얘기를 해야 하는 건가 망설이다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그럴 것 같진 않은데요.... ”


그녀는 깊게 연기를 내뿜었다.

사실 동물원인 야외에서 이렇게 여성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어쩐지 누가 보면 좋지 않은 모습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한 긴장감이 들었는데 다행히 주위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조금은 안심을 했다.


“이상하게 혼자 동물원에 오면 꼭 비가와요.”


그녀는 다소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니면 비 오는 날에 내가 혼자 오는 건가?”


어쩐지 뭔가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어 나도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비 오는 동물원도 그런대로 괜찮네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네..... 뭐.....”


조금은 비난조로 묻는 그녀의 말에 얼버무리듯 대답 하고나서 다시 침묵.

시간이 좀 지나서 그녀는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고는 마지막 폐 속에 남은 니코틴을 몰아내듯 길게 그리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이런 날도 날마다 있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이런 날도 있어야 되는 거 아닐까요? 동물들도 좀 쉬어야 할테니까.....”


나는 그녀의 말에 동의라도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아까 우리에 있는 코뿔소 보셨어요?”


또 끄덕.


“지루하고 무료해서 죽을 지경이라는 표정이더라구요.”


그녀는 말을 하고는 밝게 웃었다.


“정말 그래 보이던가요?”

“그럼요. 얼굴에 써있었는데.”


그녀의 말에 설득력이 느껴졌다. 정말 그랬을 것이다.

그녀는 잠시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다가 점점 사그라뜨리더니 우울한 듯 말했다.


“이곳에서 남자친구를 처음 만났었는데 이곳에서 얼마 전에 헤어졌어요.”


나는 순간 좀 당황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이런 얘기를 듣는다는 것이 날 긴장시킨 것이다. 어쩐지 들어서는 안 되는 비밀스런 얘기로 여겨졌다.


“왜 그랬는지 아세요?”

“뭐가요? 헤어진 거?”

“그럼 뭐겠어요?”


어이가 없다. 그걸 내가 어찌 알 수가 있겠는가?


“당연히 전 모르죠. 왜 헤어 진거죠?”

“아마 들으면 좀 우스울걸요?”

“우스우면 웃을게요.”


비교적 정중하게 얘기했는데 그녀는 내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대로 나에게 그런 얘기를 하며 대하는 게 편해진 것이리라.


“어떤 원숭이 때문이에요.”

“원숭이?”

“네, 원숭이.... 어디서 온 거였더라....?”


내가 다소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푸풋 웃고는 내리는 비를 바라봤다.


“어떤 우리에서 왔다갔다 하는 원숭이를 보고 있었는데 그중에 한마리가 가만히 앉아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저 원숭이 표정이 어딘지 우울한 것 같아.’ 했더니 그가 말했어요. ‘내가 보기엔 그게 아니고 좀 모자란 놈 같은데.’ 저는 아니라고 했죠. 저건 우울한 거라고 그리고 외로워서 그런 거라고. 그는 계속 그 원숭이는 단지 머리가 좀 모자라서 그런 거라고 그랬고 그런 식으로 서로 우기기 시작한 게 싸움의 발단이 됐죠.”


얘기를 들으면서 난 좀 이해가 안 갔다.

머리가 모자라 그러고 있던 외로워 그러고 있던 그게 왜 한 쌍의 연인에게 싸움거리가 되는 걸까. 원숭이의 문제는 원숭이의 것이고 사람의 문제는 사람의 것일 뿐인데.


“그것이 발단이 되서 큰 싸움이 된 거지만 내가 화가 났던 것은 원숭이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그 사람의 태도였죠.”

“하지만 듣기에는 그렇게 문제가 있는 사람 같지는 않은데요.”


그녀는 내말에 무표정하게 나를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에 대해서 무슨 얘기나 했나요? 그 남자는 늘 자아의 우리 속에서 사물을 봐요. 그리고 그 우리를 벗어나 있는 것들은 모두 모자라는 것들이라고 생각을 하죠. 전 그런 게 싫었어요. 우리를 벗어나 있는 것들도 감정이 있는 것들이니까.”


알 듯 모를 듯 얘기가 좀 어려워진 듯싶었다.


“난 동물원을 오면 늘 나의 우리를 보고 가요. 아니 이 안에서는 그런 생각을 안 하겠지만 정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가는 순간 그런 걸 느끼는 거죠. 여기를 벗어나는 곳이 나의 우리니까.”

“그 얘기를 들으니까 어쩐지 사람들은 모두 하나씩의 우리 안에서 지내는 것이다, 뭐 그런 얘기로 들리네요.”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비교적 비슷했어요.”


땡, 정답은 아닌가 보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다시 담배 한개 피를 요구했다.

난 아무 얘기 없이 마지막 한개 피의 남은 담배를 그녀에게 건네고 불을 붙여주었다.


“이걸 피고 가야겠어요. 비도 거의 그쳤고....”


비는 정말 그쳐가고 있었다. 저 먼 지평선은 벌써 개어가고 있었다. 구름사이로 조금씩 파란빛이 보였다.


“그것 때문에 헤어져서 오늘은 혼자 온 건가요?”


내가 어정쩡하게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날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람이 없어서였기도 했지만 내가 왜 그쪽에게 말을 걸었는지 알아요?”


나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제 얼굴 모르겠어요?”


순간 난 잠시 머리 속이 멍해졌다.


“우리가 만난 적이 있는 사람들인가요?”

“아마도 언제, 어디서였던가....”


그녀는 내가 당황해 하는 표정을 즐기기라도 하듯 웃고는 필터가까이까지 다 타 들어간 담배를 끄고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잠깐만. 날 만난 적이 있다구요?”


내가 비슷하게 일어서면서 다그치듯 말하자 그녀는 활짝 웃기만 하고는 대답 없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를 기억해보기 시작했다.

저 뒷모습을 보니 어디선가 낯익은 듯도 하고.....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내 기억 속에서 처음 보는 얼굴이다.

그녀는 이미 내 시야를 벗어나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쫓아가서 계속 물어보고 싶었지만 쉽게 몸이 움직여주지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그녀를 계속해서 떠올려보았지만 결국 난 그녀가 뭔가 착각을 했거나 아니면 나에게 농담을 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버렸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이 나는 것은 어쩌면 우리는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는 느낌이었다.

지금 나는 나의 우리로 돌아가고 있다.

어쩌면 그녀는 나의 우리 앞을 지나치는 저 많은 사람들 중에 한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녀가 지나가고 있었을 때에는 오후의 한때, 비가 내리는 날이었을 것이다.

조용하고 인적이 없었던 그 고요한 동물원 오후의 비처럼.



<끝>



※지금부터 10년 전... 내 생애 최초로 썼던 단편 소설...
실제로 그때 혼자 평일에 서울 대공원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실제로 갑자기 비가 왔죠.
비오는 동물원... 생각보다 아주 나쁘진 않았어요. 비가 오니까 주위로 사람들도 거의 없어지고,
동물들 울음소리만 가끔씩 메아리치고... 독특한 경험이였다는 생각에 이런 글을 생각했던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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