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온 세상의 사람들은 죽임을 당했다.
피가 끓는 것처럼 살의에 몸부림치던 사람들도 이제 여섯 명만이 남아있다.
그 바이러스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는 나도 알지 못한다. 다만, 바이러스에 감염된 우리들은 끊임없이 살의에 몸을 맡겨야 했고 타인을 죽임으로써 그 악독한 욕망의 끝을 보기를 원했다. 그 후라는 것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로지 살인! 어떻게 해서든 타인을 죽임으로써 자신들은 안심할 수 있는 끔찍한 시기인 것이다. 어쩔 수가 없었다.
타인들의 존재는 자신들에게 위협의 존재였다. 언제 어디서 그들은 살인자로 돌변해 자신들의 숨통을 끊어 놓을지 몰랐고 언제 자신들을 쓰레기를 짓밟듯이 눌러버릴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은 오로지 내가 살기 위해서는 타인의 존재를 없애버려야 한다는 강박감으로 변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은 그렇게 살인자로 돌변해서 서로를 죽이고 서로의 존재를 말살시키고 그렇게 자신들의 실날같은 목숨을 공격적으로 유지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여섯이다. 남은 이들은. 나 역시 살기위해 수많은 타인들의 목숨을 끊어 놓았다. 실로 다양하게, 실로 끔찍하게.....
모든 것을 전복시키는 이 상황을 과연 병적인 바이러스의 탓으로만 치부 할 수 있는 걸까....
나는 그것에 의구심을 가졌다. 너무나 조용한, 한기마저 느껴지는 어느 도시의 BAR안에서, 그 한기를 조금이라도 상쇄시키려고 틀어 놓은 오래된 가요의 음악 속에서 나는 쓸쓸히 혼자 칵테일을 만들어 홀짝거리고 마시며 나는 생각했다.
위협적인 타인의 존재.... 그리고 내가 살기위해서는 타인을 죽일 수밖에 없다는 동물의 본능적 욕구는 바이러스가 생기기 훨씬 오래전부터 인간의 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것 이였다. 그것이 병적으로 터져 나오고 제어불능이 되어버린 것일 뿐.
타인에 대한 살의로 끊임없이 살인을 저질러온 내 손을 문득 바라보며 난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회의감이 몸서리치도록 깊은 폐부를 꾹꾹 찔러대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을 이 손으로 죽였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목숨의 위협을 받고 그 위기들을 넘겼다.
이토록 처절하게 사는 것이 과연 산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나를 포함한 여섯 명. 지금 어디선가 나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그들은 서로 죽고 죽이는 생각에 잠겨 있을 것이다. 아마도 나처럼.
먹이를 찾는 승냥이 떼들처럼 살의의 눈빛을 번뜩이며 이 도시의 구석구석을 헤매고 있을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아왔다.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을씨년스런 바람소리가 창밖을 후려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어디선가 쓰레기들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호응하듯 들려왔다.
그리고.... 순간 나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미세한, 아주 이질적인 소음이 나의 청각을 자극했다.
드디어 누군가가 나에게로 온 것이다. 나를 죽이기 위해. 서서히 조여드는 올가미처럼 나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그 미지의 살인자에게 나 또한 그냥 죽여 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재빨리 실내의 불을 모두 끄고 오디오의 코드를 뽑고서 몸에 지니고 있는 무기들을 체크한 후에 온갖 다양한 술병들이 진열되어 있는 진열장의 밑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온 몸의 신경을 입구 쪽으로 곤두세우고 다가오는 살인자의 움직임에 집중하였다. 여전히 바람소리는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지만 그곳에 섞여있던 그 이질적인 소음은 더 이상 들리지 않고 있었다.
낌새를 챈 것일까......? 불을 끄지 말았어야 했다. 분명히 갑자기 꺼진 등빛으로 침입자이자 살인자는 이쪽이 방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챈 것이다.
나는 소리 없이 선반위로 머리를 살짝 들어서 홀 전경을 살폈다. 그 어떤 움직임이나 인기척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포기하고 가버린 걸까?
이쪽이 이미 알아차리고 방비를 하고 있다는 낌새를 알았다면 저쪽도 포기하고 다음기회를 노릴 확률이 많았다.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 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100%의 완벽한 기회가 아니라면 다음을 노리는 것이다. 단 1%라도 실패할 상황이 있는 것이라면 모험을 걸 수 없는 것이다.
더 이상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나는 웅크렸던 몸을 천천히 일으켜 눈앞으로 펼쳐진 어둡고 횡 한 BAR의 내부를 쓸쓸히 바라보았다. 이상한 감각에 문득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느 틈엔가 총을 쥐고 있는 오른손이 눈에 띌 정도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의외였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피를 묻혔는데도 새로운 살인에는 또 떨리는 것인가.....?
한숨이 나왔다. 무의미한 살인. 그러나 살기위한 살인.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나는 놓여있는 아직 다 마시지 못한 칵테일 잔을 들어서 천천히 음미하면서 입에서 잔을 떼었다. 순간 지축을 울리는 듯 한 거대한 폭음과 함께 뭔가가 빠른 속도의 바람소리를 일으키며 내 귓가를 스쳐갔다. 그리고 들고 있던 잔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돼버렸다.
방심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숙이고 엄폐물을 찾아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몇 발의 총성이 연거푸 울리며 내가 빠르게 지나가는 옆의 사물들을 박살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헤매다가 간신히 놓여있는 탁자를 쓰러뜨리고 그 뒤로 몸을 숨기자 총성은 잠시 휴지기를 갖는 듯 멈췄다.
나의 호흡은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거칠어져 있었다. 귓가로 아련한 고통이 밀려왔다. 나는 손으로 왼쪽 귀를 만졌다.
“으윽!”
나도 모르게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손에는 시커먼 피가 범벅이 돼있었다.
씨발, 귀가 날아가 버렸어.
의식하지 못했던 고통이 갑자기 두뇌를 찔러왔다.
더 시급한 일이 있다. 나는 일단 고통을 참아내며 맞은편의 동정에 최대한 촉각을 곤두세웠다.
망할 새끼. 갈기갈기 찢어 죽여주겠어!
가라앉았던 살인 바이러스가 몸 안으로 또 다시 순환하기 시작했다. 총을 쥔 손으로 가득 힘이 들어갔다.
맞은편의 살인자 녀석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동정을 살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녀석은 분명히 그곳에 있었다. 어두워 사물이 잘 보이지 않지만 미세한 공기의 진동으로 와 닿는 녀석의 호흡이 느껴졌다.
어디 보자.
나는 슬쩍 고개를 쓰러진 탁자위로 올려보았다. 순간 여지없이 몇 발의 총알이 탁자로 쏟아져 왔다. 재빨리 다시 머리를 집어넣고 나는 녀석의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탁자에 기대앉아 나는 가득 후회감이 밀려왔다.
어째서 방심을 해버렸을까. 끝까지 경계심을 풀어선 안 되는 거였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여기서 이렇게 끝이 나버리는 건가? 이대로.... 간신히 여기까지 살아남아 왔는데....
귀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멈출 생각이 없는지 계속 왼쪽 어깨를 적셔가고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죽어 버리는 게 나은 일인지도 모른다.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들도.... 모두 죽어 버리지 않았나.... 더 이상 이렇게 생명을 이어 간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때 녀석의 움직임 소리가 들렸다.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살아야 한다! 저 새끼를 죽이고 살아야 한다. 난 살아야 하는 인간이다! 이대로 무의미하게 죽기 싫다! 귀를 치료해야 해. 그러려면 저 새끼부터 죽여야 한다. 여지껏 버텨 왔는데 이렇게 끝낼 수야 없다!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총을 쥔 손에 힘을 줬다. 그리고 주위를 조심히 살폈다. 문득 위쪽으로 시선이 갔을 때 벽에 부착되어 있는 샹들리에가 보였다.
나는 샹들리에를 겨누고 방아쇠를 여러 번 당겼다. 나의 총구에서 뻗어나간 총알은 샹들리에와 벽이 부착되어 있는 나사들을 박살냈고 지탱하는 힘을 잃은 샹들리에는 벽에서 떨어져 나와 그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박살이 났다.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몸을 재빨리 움직이면서 녀석이 위치할 만한 곳에다 총알을 퍼부었다. 연속된 탄약의 폭발음이 귀를 때렸고 BAR안의 기물들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파편을 튀겼다.
나는 움직이면서 총을 갈기고 파편이 튀는 그 사이로 녀석의 빨간색 모자를 볼 수가 있었다. 녀석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됐다. 나는 진열장 아래로 다가가 다시 몸을 숨겼고 녀석이 반격을 하듯 나에게로 총알을 퍼부었다. 내가 웅크린 아래 바닥으로 병 조각들이 산산이 부셔져 내렸다.
상대방의 총격이 잠시 멈췄을 때 나는 내 머리위쪽을 바라보았다. 아직 멀쩡하게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놓여있는 술병들이 꽤 많이 남아 있었다.
녀석은 아직 그 위치 그대로다. 좋아!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들어 진열장의 술들을 하나하나 품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바닥에 쭉 늘어놓고 병에 붙어있는 라벨들을 살폈다.
죽기 아니면 살기. 바닥으로 귀에서 흘러나온 핏방울들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나는 그 녀석의 위치를 다시 냉철하게 가늠해 보고는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손에든 병을 공중으로 던졌다. 병은 포물선을 그으며 날아갔고 곧 바닥에 떨어져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악!”
녀석의 가늘고 얇은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그것에 신경 쓸 틈도 없이 연거푸 바닥에 있는 병들을 힘껏 던졌다. 병은 연이어 계속 날아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박살이 났고 녀석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지 날아오는 병을 향해 허공으로 총을 쏴댔다. 그러나 어둠 속의 표적은 쉽게 맞혀지지 않을 것 이였다.
나는 계속해서 열병 가까운 병을 던진 후 마지막 병을 힘껏 던지고는 재빨리 주머니에서 지포 라이터를 꺼냈다. 그리고 뚜껑을 젖혀서 불을 당기고 다시 녀석의 위치로 가볍게 던졌다.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히면서 지포 라이터는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고 곧 바닥이 높은 도수의 알코올로 홍건이 젖어있는 위에 떨어졌다. 불은 순식간에 알코올의 위로 퍼져서 그 위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녀석은 단발마의 비명을 지르며 우당탕 움직였고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몸을 일으켜 상황을 살폈다. 녀석은 불길을 피해 자신의 엄폐물 밖으로 뛰어 나왔고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손에 쥔 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녀석은 움찔하고는 움직이던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바닥으로 털썩 쓰러졌다.
나는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총알은 나가지 않았다. 총알을 다 써버렸던 것이다.
나는 주춤거리며 녀석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잠바의 안주머니에서 탄창을 꺼내 교환을 하고 다시 녀석에게로 총을 겨눴다.
녀석은 모자를 푹 눌러쓴 머리를 고통스러운 듯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숨이 끊어 진 것이 아니었다. 총알이 어깨를 관통했는지 옷의 오른쪽 어깨부분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나는 녀석을 내려다 봤다.
이제 네 명 남았군..... 어쨌든 또 살았다.
나는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녀석의 머리로 총을 겨눴다. 그때였다. 녀석이 나를 쳐다 본 것은.
바닥의 술을 태우고 있던 불길은 어느새 나무로 된 탁자와 의자들을 하나둘씩 태우면서 번져 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꽤 커진 불빛에 비춰진 녀석의 얼굴은 확연히 나의 눈으로 보여 졌다.
커다란 눈, 얇은 입술, 긴 속눈썹, 가지런한 콧날.... 나는 잠시 멍해 있다가 그가 쓰고 있던 빨간색 모자를 벗겼다.
위로 틀어 올려져 모자 속에 감춰졌던 긴 생머리가 고정한 던 힘을 잃고 바닥으로 풀어져 내려왔다.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 녀석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여자였다.
물론..... 여자를 죽여 본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숱하게 많은 여자들을 나는 내손으로 죽였었다.
목숨은 남녀노소에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고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낌 없이 살인을 저질러온 이 내가 왜 저 여자는 죽이지 못했던 것일까.....?
난 나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그녀가 누워 있는 쪽을 바라다보았다.
그녀는 어깨에 붕대가 감겨진 상태로 반듯이 누워서 잠들어 있었다. 평온해 보였다. 지금의 그녀의 모습은 도저히 나에게 총알을 날렸던 살인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나이는 한 20대 초반쯤 됐을까, 그런데 외모는 마치 꿈속에서 동화 속을 뛰어 다니고 있는 앳된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다.
문득 그녀가 누워 있는 위로 벽에 걸려있는 거울이 보였다. 거울 속에는 초췌한 모습의 사내가 붕대로 왼쪽 귀와 머리를 감싸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사내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래..... 그랬었군.....
그녀에게 총을 겨눈 그때 난 보았던 것이다. 그녀의 눈빛을. 그리고 그 속에서 또 보았던 것이다. 바로 나의 눈빛을. 살인과 광기로 얼룩진 살인자의 눈빛을.
나는 다시 그녀를 보았다. 피곤함이 몰려왔다. 언제 그녀가 의식을 차리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나는 잠에 빠질 수가 없었다. 그것은 곧 죽음을 뜻하기 때문에.
자고 싶었다. 그저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평온한 숲 속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고 그녀의 따뜻한 몸을 품에 안고 아늑하게. 며칠이라도 좋고 몇 년이라도 좋을 그런 깊은 잠에 푹 빠져 버리고 싶었다.
착각같이 천천히 눈에 눈물이 고이는 듯 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 진걸까? 왜 이렇게 본능적으로 주체하지 못하는 살의로 자신을 파괴해버려야 하는 걸까? 도대체 그 바이러스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무엇이....어떻게 하면..... 그 바이러스를 이겨낼 수 있는 것일까....?
그녀가 몸을 뒤척였다. 순간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놓여있는 총으로 손이 갔다. 그러나 그녀의 움직임은 그대로 멈췄고 그녀는 다시 새근거리며 잠에 빠져 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편안해 보였다.
우리가.... 사랑을, 사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이라. 내가 도대체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이 얼마만의 일인가....
잠시라도 좋으니 그 사랑이라는 것을 다시 해보고 싶었다. 어쩌면, 저 여자라면, 나와 같은 생각으로 그렇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는 이 바이러스의 저주로부터 벗어나서 앞으로의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잠들어 있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꿈을 꾸고 있구나.
아마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나에게 있어선 분명했다. 난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 거였다. 너무도 오랜만에. 너무도 강렬하게.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아마도 의식을 차리면 그녀는 자신을 지킨다는 명분하에 또다시 나에게 살의를 드러낼 것이다. 언제든지 기회가 생겨지면.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으리라. 내가 그래왔던 것처럼. 그리고 나는 또 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그녀를 서슴없이 처치해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우리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들이구나. 이렇게 벅찬 사랑을 서로 속삭이며 품어주면서 보내야 할 시간을 저 처참한 살육들로 보내고 있다니.
그녀에 대한 사랑을 느끼면서부터는 난 더 이상 살인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초조해 졌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녀와 나..... 둘 중 하나의 생존.....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녀가 누워있는 앞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나의 사랑은..... 어차피 이것은 비극적 결말만이 있을 뿐이다. 좋아!
난 허리춤에서 차갑게 식은 권총을 빼들었다. 그리고 단호하게 약실로 실탄을 철컥하고 장전했다.
나는 그녀가 누워있는 맞은편 벽에 기대앉아 한동안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4,5미터쯤 떨어진 곳에 누워있는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그녀가 의식이 돌아온 듯 천천히 눈을 뜨고 주위를 살폈다. 그렇게 눈을 뜨자마자 곧 그녀의 전신은 긴장감으로 감돌기 시작했다. 그녀는 빨리 상체를 일으키려다 어깨에 고통이 온 듯 인상을 쓰며 잠시 주춤했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고 주위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듯 살펴보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녀를 보면서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상황파악이 잘 안되는지 당혹해 하는 모습이었다. 자신의 어깨에 감겨진 붕대를 힐끗 보고는 나의 모습을 잔뜩 경계하는 모습으로 다시 엉거주춤 일어나 앉아있었다.
그녀는 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그녀의 눈빛에 예전에 나도 쭉 가지고 있었던 살인을 궁리하는 그런 눈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녀에게서 좀 떨어진 바닥에는 총이 놓여 있었다. 내가 수많은 사람들을 황천길로 보냈던 그 총.
그녀는 그것을 보고는 아무 망설임 없이 재빠른 동작으로 총을 움켜잡고 나를 겨냥했다. 그것도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다.
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저 부드럽게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는 총을 겨눈 채 천천히 일어서서 내게로 적당한 거리까지 다가왔다. 그녀의 총은 정확히 나의 가슴을 노려보고 있었다. 난 아무래도 좋았다. 그리고 아까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마음속의 한마디를 최대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목소리가 어떤지 듣고 싶군.”
처음으로 내가 입을 떼자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잠시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아주 잠깐이었지만 경계가 느슨해진 것 같았었다. 아니, 얼핏 희미한 미소까지 지었던 것 같다.
“안녕....”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뜻밖의 말에 내가 멍해지자 그녀는 가차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쓰러져 가는 내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의식이 어디론가 점차로 멀어져 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오랜만에 나는 편안한 상태가 되었다고 여겼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도 나는 내 심장을 꿰뚫은 총알구멍으로 피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가 있었다.
죽음이란 건 이런 것이었군. 나에게 죽어간 사람들도 이런 느낌이었겠지.... 나에게 죽어간 사람들....
의미해져가는 의식을 간신히 붙잡으며 어머니를 떠올렸다. 내 손에 죽어간 어머니.
어머니는 나에게서 죽어갈 때 만족한 미소를 짓고 계셨었다. 난 의아해 했다. 조금 전 나의 모습에 의아해 했던 그녀처럼.
어머니는 오히려 나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먼저 잡았었다. 그런데 나를 죽이지 않으셨다. 오히려 날 보호하셨고 당신이 오히려 내 손에 죽음을 당했었다. 지금 내가 짓고 있는 이런 미소를 지으시면서 말이다.
왜 그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이 아들에게서 죽음을 맞이하실 수가 있었는지 이제는 이해가 갔다. 어머니의 나를 사랑하는 모성(母性)에 살인 바이러스 따위는 작용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난 그녀의 모성도 믿는다.
아마 지금쯤 그녀의 몸 안에 자리를 잡은 우리의 사랑의 결정체는 그녀가 훌륭하게 지켜 줄 것이다. 이제 네 명이 남은 타인의 손으로부터, 그녀 자신의 손으로부터도. 그리고 이제 이 살의의 시대는 막이 내릴 것이다. 나의 분신으로부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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