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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소설 작업실

[자작 단편소설] 산타모니카의 아침

by 멀티공작소 2010.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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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모니카의 아침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었다.

시간감각이 사라져 확신을 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이 분명 아침이라는 것을 난 분명히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여긴 어디지?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나는 생각한다. 나는 여태껏 침대에서 잠을 자본 기억이 없다. 왜냐하면 내방에는 침대가 없었으니까.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본다. 입에서 역한 술 냄새가 위를 자극한다. 나는 침대에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질질 끌면서 일어나 실내에 벽을 차지하고 있는 문들을 살폈다. 어느 것이 가장 화장실다운 문일까. 지금의 나에게 그건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난 적어도 토하지 말아야 할 곳에서 토하기는 싫은 것이다. 다행히 찾기가 쉬웠다. 문 앞에 앙증맞은 팬시장식물이 달려 있었던 거였다.

 

'BathRoom'

 

나는 재빨리 들어가 위 속이 내용물들을 변기통을 붙잡고 웩웩거리며 쏟아냈다. 변기에 물을 내리고 머리를 들자 엄청 몸에 힘이 들어갔던 것인지 좀 전보다 더욱 머리가 웅웅 거리며 기계 돌아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세면대에 물을 틀고 입을 헹구고 정신도 차릴 겸 찬물에 얼굴을 적셨다. 그리고 걸쳐있는 수건에 찍어내듯이 물기를 없애고 다시 원래 있던 장소로 나왔다. 나오면서 그제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다.

 

'BathRoom?'

 

뭔가 이상하다. 그래, 알았어. 삐익 부져를 누른다. 정답! R이야. R이 이상하다구. 소문자라야 된다구. 그러나 아무도 정답! 축하합니다! 따위의 말은 하지 않는다. 모두 침묵하고 있다.

이제야 좀 머리의 두통이 가라앉고 있었다. 아마도 뇌세포와 알콜의 승부가 대충 갈리고 있는 듯싶었다. 뇌세포 승!

나는 널찍한 방? 거실? 을 걸어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다시 근본적인 처음의 물음을 생각해 낸다. 여긴 어딘가? 순간 뇌세포가 일깨워 준다. 그제서야 기억의 고리가 연결된다. 그랬군. 맞아. 머리가 뇌세포의 일깨움에 고마움을 표시하듯 끄덕거리고 움직인다.

하나의 물꼬가 터지자 점차 모든 것이 자리를 잡아간다. 모든 것들이 빠르게 머릿속에서 출력이 되어간다.

원룸. 이곳은 원룸이다. 그리고 지금 그럴듯한 음악도 흐르고 있었다. 익숙한 음악이다. 친구가 좋아했던, 즐겨듣던 음악. Queen의 ‘A Night at the Opera’ CD다. 길고 긴 음악 ‘The Prophets Song' 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음악이다. 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솔직히.

 

 

 

 

친구는 인도로 가버렸다. 음? 그렇다고 해서 친구가 원래 집이 인도라는 얘기는 아니다. 좀더 알아듣기 쉽게 얘기한다면, 즉, 여행을 떠난 거였다.

 

“한 1년쯤 되지 않을까 싶어. 모르지. 좀 지낼 만 하면 그보다 오래 있을지도.”

 

갑작스럽게 회사를 그만두더니 - 자세한건 모르지만 그는 쫓겨났다는 투로 얘기했다 - 어느 날 연락을 해왔던 것이다. e메일로.

 

‘갑작스레 연락을 해서 미안하다.’

 

메일은 그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예의가 바르다. 학생 때도 그랬다. 그와 나는 중학교 동기였다.

 

< 사이트를 통해 메일 주소를 알게 됐어.

나는 너를 만나고 싶다.

너무나 오랜 세월 지났지만

난 우리가 언제나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해.

나에게 연락을 해주면 좋겠어.

기다릴게.>

 

메일을 읽을 때 난 마치 한편의 시를 읽는 듯 한 기분이었다. 그는 문자의 배열조차도 마치 시처럼 해 보냈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다.

나는 답장을 보냈고 그와 곧바로 연락을 취해 그 날 저녁 바로 그를 만나게 됐다. 대단한 스피드였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앳된 외모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봄바람 같은 싱그러운 미소를 소유한 사람이었다.

 

“예전하고 똑같군.”

 

그가 나를 만나자 마자 던진 첫마디는 그거였다. 나는 그저 조용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역시 그의 미소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초라한 느낌이다.

그는 날씨가 추우니 따뜻한 걸 먹자고 하면서 종업원에게 정종 두 잔과 참치 회를 주문했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리고는 어쨌든 그가 먼저 어떤 얘기든 꺼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 역시 잠시 우두커니 자신의 손만 내려다보고 있는 채로 별 말이 없었다. 그와 난 굉장히 오랜 시간 만나지 못했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하기는 쉽다. 정확히 말해서 우리는 중학교 졸업식을 끝으로 한번도 연락도, 만남도 없었던 것이다.

 

 

 

 

중학교 때의 나, 그건 평범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특별한 구석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내 인생의 특별한 하나가 있다면 그건 내가 도서부장을 한 일년간 했었다는 정도 일 듯싶다. 중 2때. 하지만 도서부장을 한다고 해서 결코 책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늘 책을 가까이 하고 있었을 뿐. 그 당시 나를 매혹시킬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나는 안티기질만 잔뜩 가지고 있어서 어떤 것이든 반대급부로만 여겨졌다. 그리고 미워하는 것도 한 다발은 가지고 있었다. 그 중하나가 같은 반의 용두라는 녀석이었다. 아이들은 그를 ‘용머리, 용머리’ 하면서 불렀었는데 - 성적(性的)으로 좀 조숙했던 어떤 녀석은 그를 귀두라고만 부르기도 했다 - 유독 나에게 알 수 없는 적개심을 갖고 대하는 녀석이었다.

 

“어이, 돈 좀 꿔주지?”

 

덩치에 어울리게 그 녀석은 늘 나를 ‘어이’ 라고 부르며 심심하면 돈을 빼앗아갔다. 분명히 그건 빼앗아 간 거다. 왜냐면 그는 그렇게 말하고 내 돈을 가져가서 한번도 갚은 적이 없었으니까. 그럼 주지 않으면 될 것 아니냐고?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가슴에 불만을 쌓아 놓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체념을 해버리고 있었다. 까짓 몇 푼 안 되는 거. 중학생이 돈을 갖고 있어봐야 얼마나 갖고 있겠는가?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은 녀석은 따 그때에 갖고 있는 돈 외에 얼마를 갖다 바치라느니 그런 요구는 없었다. 나름대로 그런 삥의 철학(?)은 있었던 듯 했다. 하지만 내가 그 녀석을 미워하는 데에는 돈을 뺏기는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내가 정말 못 견디게 싫었던 것은 그 자식이 나를 부를 때 쓰는 호칭 ‘어이’ 였다. 난 정말로 그 말이 너무너무 듣기가 싫었던 것이다. 난 분명히 번듯한 이름이 있었다. 그것도 부모님이 비싸게 작명소에서 지었다는 그럴듯한 이름이다. 이름을 부르나 어이라고 부르나 다른 게 뭐가 있는 가, 고 묻는다면 딱히 할말을 없지만 당시의 나는 내 이름에 조금은 병적일 정도의 집착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았다. 특히 그 녀석이 나를 그렇게 부르는 것은 귀를 파 버리고 싶을 정도로 듣기가 싫었었다.

어쨌든 중2때 한 반이 되서 초겨울이 될 때까지 나는 별수 없이 그 녀석의 현금지급기가 되어 있었는데 그때쯤에 한 학생이 내가 있는 반에 전학을 왔다.

처음 봤을 때부터 난 그 애의 의미심장한 듯 한 미소가 몹시도 마음에 들었었다. 부러운 미소였다. 나도 그런 미소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학 온 애들이 늘 그렇듯이 그 애도 처음엔 아이들과 서먹하며 잘 융화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가끔씩 그 애가 혼자 조용히 앉아서 점심을 먹는 것을 보고 있으면 뭐라 얘기라도 걸어볼까 생각은 했었지만 나도 그렇게 숫기가 있는 성격은 못돼서 그냥 지나치고는 했었다. 그런데 그 애의 전학으로 나와 용두가 관련한 교실의 정세(?)가 조금씩 변화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디나 기질을 발휘하는 텃세라는 것을 용두가 그 애에게 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나는 조금 숨통을 트일 수가 있었던 거였다. 그런데 그 애는 나와는 달랐다. 처음부터 대꾸없이 용두의 말을 무시하고는 일체 그와 상대를 하지 않으려 했다.

 

“이 새끼가, 너 약 먹었냐? 내 말을 좆으로 들어?”

 

그리고는 그 애의 고난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용두의 화살 방향이 바뀌면서 나에게는 햇살이 비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건 잠시 뿐이었다.

용두는 그 애에게 자신의 위협이 잘 먹혀들지 않자 - 폭력도 소용이 없었다! - 그 화풀이를 내 쪽으로 다시 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로인해 내 머리 위로는 다시 먹구름이 끼어 가고 있었다. 심지어 그의 요구는 예전보다 훨씬 강도를 더 해가고 있었다. 그동안 잊어먹고 있던 것까지 을궈 먹겠다는 심보였다. 그리고 계속되는 ‘어이’‘어이’‘어이’!

난 어느 날 도서관에서 반납된 책을 책꽂이에 꽂다가 갑자기 밀려오는 분노에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 그런 생각이 그때 거기서 갑작스럽게 든 것인지는 지금 생각해도 좀 의아했지만 그건 아마도 책들에 둘러싸 인데서 받는 어떤 위압감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폭발이 될 라면 압축이 필요한 것이라는 그런 거다. 그리고 나서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난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생각해 나갔다.

 

 

 

어두운 골목에 기대서 나는 가끔씩 길가를 염탐하며 지켜봤다. 결국 난 극단의 방법을 써먹기로 했다. 단 한번만이면 된다는 생각에 폭력을 동원하기로 한 것이다. 내 왼손에는 묵직한 각목이 들려있었고 - 우습게도 난 이것을 목재상에 특별 주문으로 만들었다 - 단 한방의 가격으로 용두 녀석의 뒤통수를 치리라, 고 결심했다. 그리고.... 달아난다. 사전에 녀석의 뒤를 몰래 따라다니며 어느 장소가 적합한지도 물색해 놨었다. 그곳이 지금 내가 기다리고 있는 여기였다. 어둡고 인적도 뜸하고. 조용히 접근해 재빨리 일을 벌리고 튄다. 나는 그럴듯한 작전명까지 붙였다. Hit and Run! 그러면 뒤탈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설사 뒤탈이 있더라도, 이로인해 더 괴롭힘을 당한다 하더라도 난 이 한방으로 모든 것이 위로 되리라고 생각했다.

발소리가 들린다. 나는 모퉁에 숨어서 슬쩍 밖을 내다봤다. 우람한 덩치의 실루엣이 걸어오고 있다. 틀림없는 그 녀석, 용두다. 귀두만도 못한 놈!

용두가 숨어 있는 나를 못보고 그대로 지나쳐 간다. 1단계는 성공이다. 다음. 나는 골목을 나와 그녀석의 뒤를 조용히 따라간다. 발소리도 조심한다. 다행히 녀석은 자신의 뒤에 내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 한 채 되지도 않는 가요를 흥얼거리며 걷고 있다. 드디어 내가 점찍어 놓았던 장소로 가까워졌다. 나는 뒤를 쫓던 걸음걸이의 속도를 높여간다. 긴장으로 숨이 조금씩 가빠져 간다. 드디어 머릿속으로 X표를 해놓았던 장소다. 나는 그 녀석의 뒤로 바짝 접근해 가기 위해 발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바로 2m 정도까지 가까워졌다. 지금이다!

나는 두 손으로 움켜쥔 각목을 쳐들었다. 그런데 순간 내 오른 쪽에서 검은 물체가 순식간에 튀어나와 용두와 내 사이를 가로 막았다.

퍽퍽!

둔탁한 소리가 어두운 길가에 울려 퍼졌다. 나는 잠시 멍한 상태로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바라봤다. 내 바로 앞에서 뒷모습으로 숨을 헐떡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천천히 들었던 각목을 내리며 그 사람의 옆으로 주춤거리며 다가갔다. 나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그 애였다. 전학생. 그 애도 날 쳐다본다. 잔뜩 상기한 표정이다. 나와 그 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 앞에 대(大)자로 뻗어 있는 용두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다시 서로를 쳐다봤다. 그 날은 분명히 기억한다. 그날은 11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리고 우린 그날부터 친해졌다.

 

 

 

“난 인도로 떠나. 아마 다음주쯤 될 거야.”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가 내게 불쑥 그렇게 말했다. 나는 기본 안주로 나온 메추라기 알을 깨작거리며 까고 있다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인도?”

“그래, 인도.”

“일 때문에?”

 

그는 웃었다.

 

“아냐. 내가 하는 일은 인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야. 아니. 일이었어.”

 

그는 과거형으로 고쳐 말했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일은 그만뒀어. 아니, 쫓겨났다고 해야 하나.”

 

그는 또 고쳐서 말을 했다.

 

“별로 그렇게 하고 싶던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면 관광으로 가는 거구나.”

 

내가 짐작으로 말하자 그는 그 말에는 별 대꾸 없이 조용히 웃기만 했다. 잠시 후 종업원이 접시에 담긴 참치 회와 기다란 유리 글라스를 가져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정종을 가득 차게 부었다. 정말로 한 치의 틈도 없도록 정확히 가득 찬 정종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좀 식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바로 잔을 들고는 입이 데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후루룩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김으로 참치 회 한 조각을 싸서 간장에 찍은 후 입안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그리고 만족한 듯한 미소까지. 보고 있자니 군더더기 없는 컨베이어 시스템을 연상시켰다.

 

“사실은 부탁이 있어.”

“부탁?”

 

나는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는 건배를 청했다. 나는 뜨거운 정종이 흐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와 잔을 부딪치고 한 모금 마셨다. 조심했지만 정종은 잔을 타고 흘러내렸다. 목과 손가락에 동시에 뜨끈한 기운이 전해졌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원룸이야. 그런데 오랜 시간 비워두면 좀 그런 것 같아서 누군가에게 좀 맡겨뒀으면 좋겠는데 지금 있는 주변에 마땅한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그래서 네가 좀 있어주면 안될까 해서.”

 

그는 조용한 음성으로 딱 필요한 말만 말했다. 요점이 간결했고 이해가 빨리 됐다.

난 당황했다.

 

“하지만....”

“결혼했나?”

 

뜻밖의 물음에 나는 어리둥절해 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사는 곳을 옮기는데 무슨 문제가 있어?”

“그렇진 않아.”

“그럼 됐잖아.”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라구, 하고 말하려다 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생각해 보니 나도 이사할 때가 되긴 되었다. 전세 계약도 만료되어 가고 있었고 전세금을 올릴 돈도 없었다. 내게 있어 적절한 기회가 온 것 일수도 있었다. 흠, 그렇긴 한데....

 

“지내기 편할 거야. 모든 게 다 갖춰져 있으니까. 만약 내가 돌아올 때가 된다면....”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고는 말한다.

 

“....일, 이개월전엔 연락을 해줄게.”

 

나는 잠시 그의 제안을 곰곰이 생각했다. 나쁘지 않다. 아니, 어쩌면 내겐 잘된 일인지도.

 

“그런데.... 왜 내게 이런 부탁을 하는 거야?”

“좀 전에 말했잖아? 지금 주변엔 부탁할만한 사람이 없다고.”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로서는 좀 아주 의외의 상황이었다. 나는 잠시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 알겠어. 그렇게 하지.”

“그럴 줄 알았어. 자, 한 잔 하자구.”

 

그는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술을 들이켰다. 나는 정종을 목으로 넘기며 여전히 그에게는 사람을 거부하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씩 위로부터 핏줄을 타고 알코올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어느새 음악이 끝나 있었다.

나는 잠시 침대에 비스듬히 올라가 원룸의 내부를 쭉 훑어보았다. 그럭저럭 집을 옮기고 열흘 가까이 흘렀지만 이곳이 내 집이라는 느낌은 들지가 않았다. 친구가 많은 살림살이며 가재도구를 그대로 둔 채 갔지만 이제는 내 개인 물건들도 꽤 들어차 있어서 난 금방 적응이 되리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대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뜰 때 마다 여기가 어딘지 되묻고는 한다. 어제도 과음에 필름까지 끊겨 버려서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찾아올 수 있었던 게 다행이다.

흔적이라는 것을 무시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안에는 그의 흔적이 너무도 많이 묻어 있는 거였다. 그리고 어쩐지 그것은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묵직한 돌덩이가 위 속에 쳐 박혀 있는 듯 한 그런 느낌.

휴.

나는 길게 숨을 내 쉬어 본다. 그리고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려본다. 멀리보이는 흐린 하늘과 공장의 굴뚝이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인도라....

왜 그렇게 사람들은 여행지로 인도를 좋아할까? 내 주위로 내가 아는 사람만도 인도를 여행했던 사람이 부지기수다. 어떤 매력이 있어서 그들은 그렇게 인도로, 인도로 향하는 걸까.

친구를 만난 그때 술자리에서도 그는 왜 인도로 가는지 끝내 대답을 하지 않았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제 2차 졸음이 마구 밀려온다. 결국 또 잠들어 버린다.

 

 

 

중3이 되면서 그와 나는 또 한 반이 되었다.

용두테러사건 - 그는 그 일을 그렇게 부르는 걸 좋아했다 - 이후 우리는 자주 학교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로 발전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의 그 건에 대해서는 서로 피하듯이 입에 담지를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는 서로의 가정이나 가족 그런 것도 일체 얘기하지를 않았다. 대신 우리는 그 외의 것들은 무엇이든 얘기를 나눴었다. 아마도 그건 그의 의도였지 않았나 싶다. 우리가 대화를 나눌 때는 거의 그가 대화를 주도하면서 나를 이끌었었으니까. 우리는 실로 많은 것들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얘기하고는 했다. 정치에 대한 욕, 성적인 농담들, 여행정보, 학교에 대한 얘기, 연예소식 등등. 그 당시 우리에게는 너무도 많은 할 얘기들이 주위에 널려 있었고 우리는 낄낄거리며 그런 것들을 주워 담고 있었다. 가끔 얘기를 나누다 보면 난 그가 꽤 독서량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도 나름대로 독창적인 데가 있었다.

 

“나는 사랑이라는 게 굉장히 불합리한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건 지독한 이타주의고. 왜냐하면 사랑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상대, 즉 대상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은 대부분 합리적인 일이 아냐. 그것이 사람일 때는 더 말할 나위도 없지. 그러니까 그것이 사람을 얼마나 소모시키는 일인지 너도 알 수 있지?”

“그런가?”

“거기다가 사랑이란 건 여러 가지 공평치 못한 요소들로 잔뜩 채워져 있다구. 그 저울은 꼭 어느 한 쪽으로든 기울게 돼 있는 거야. 100 퍼센트!”

 

그와 얘기를 나누다 보면 난 내 자신이 도서관의 책들에 둘러싸였었던 그 위압감이 가끔 떠오르고는 했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와 가까워진 그때부터 나는 비로소 책이라는 것을 읽기 시작했다. 나에게 있어서 그런 변화는 그를 이겨보겠다는 경쟁심리보다는 그와 적당히 맞춰는 나가야겠다는 묘한 동반자적인 의욕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내가 다시 잠을 깬 건 차임벨이 울리면서였다.

나는 여전히 끈질긴 항전을 벌이는 술기운에 몽롱한 기분으로 귓가로 파고드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슬쩍 머리를 들고 현관문을 바라본 후 무시해 버리기로 결정. 다시 베개로 머리를 파묻었다. 지겨운 잡상인들. 아무도 없는 척 대꾸를 안 해주면 제풀에 지쳐 사라지겠지. 언제나 그랬었으니까.

차임벨은 계속 울리고 있었다. 끊길 만 하면 또 울리고, 또 울리고. 집요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지칠 줄 모르고 계속 울려대고 있었다. 이때쯤 나는 슬슬 짜증이라는 게 솟구친다.

별 수없군. 난 포기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유 윈(You Win)!

내가 걸림 쇠를 젖히고 문을 열자 복도에는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청색 원피스에 하얀 색의 가디건을 걸치고 왼손에는 이름 모를 화초가 꽂혀있는 조그만 크기의 화분을 들고 있었다. 꼭 영화 레옹에 나오는 마틸다를 연상시키는 포즈였다. 그리고 그녀는 나를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구시죠?”

 

그녀는 내게 말했고 난 내가 해야 할말을 그녀가 먼저 꺼내자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예?”

“누구시냐구요?”

 

허어. 이거 참.

 

“이 집에 사는 사람인데요? 그렇게 말하시는 아가씨는 누군가요?”

 

마치 서로 선문답을 하고 있는 묘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뒤로 보이는 잔뜩 찌푸린 하늘빛 같은 얼굴을 하며 내 뒤로 보이는 원룸 안을 살피려 했다.

 

“이보세요!”

 

내가 다그치듯 부르자 그녀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내게 말했다.

 

“여기.... 김정윤 씨 댁 아니에요?”

 

김정윤이라는 이름은 내 친구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친구를 찾아 온 거였다. 나는 그제야 울컥하던 심사를 누르고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 친구를 찾아 오신건가요? 그 친구 지금.... 없는데.”

 

내가 말끝을 흐리며 말하자 그녀는 조금 안심한 듯한 얼굴로 숨을 길게 내쉬고는 다시 내 얼굴을 쳐다봤다.

 

“멀리 갔나요? 아니면 가까운데 나간 거예요?”

 

그녀가 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잠깐 어떻게 얘기를 해야 할지 조금 난감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식으로 얘기를 해야 할지 조금 갈등하고 있는 사이에 그녀는 다시 인상을 쓰고는 먼저 말했다.

 

“그런데 괜찮다면 좀 들어가서 얘기해도 되겠죠? 이렇게 서 있자니 너무 힘드네요.”

“아니, 저기....”

 

그녀는 대 말을 듣지도 않고 자신의 옆에 있는 커다란 짐 가방을 질질 끌면서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나는 낑낑대며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어이없는 기분이 들었다.

휴, 웬 난리람?

나는 문을 닫고 그녀가 서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마치 제 집처럼 가방을 한 쪽 구석에 놓고 가지고 있던 화분을 창가에 툭 놓아 버리고는 침대에 털썩 앉았다. 굉장히 자연스런 동작이었다.

 

“자, 이제 얘기를 좀 들어 볼까요? 그 사람 어딨죠?”

 

그녀는 도전적인 눈빛을 하고는 내게 다그치듯 물었다. 혹시 직업이 형사가 아닐까하는 우스운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나는 팔짱을 끼고 잠시 턱을 쓰다듬다가 말했다.

 

“그 친구와는 어떤 관곕니까?”

 

내가 호락호락하게 넘어가 주지 않을 태도를 보이니까 그녀는 픽 웃음을 지었다.

 

“걱정 마세요. 떼먹은 돈 받으러 왔거나, 체포하러 온건 아니니까요.”

“저도 그 정도는 압니다.”

 

당연히 알 수 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그는 그럴 사람은 아니다. 여자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나도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잠시 묘한 침묵이 감돈다. 그녀는 자신의 긴 생머리를 살짝 넘기고는 가디건을 천천히 벗어서 한 쪽에 걸쳐 놓으며 말했다.

 

“그 사람 친구세요?”

“친굽니다.”

 

그녀는 뭐가 우스운지 ‘풋’ 하며 다시 웃고는 다리를 꼬면서 아까의 그 도전적인 눈빛으로 다시 나를 쳐다봤다.

 

“난 그 사람 애인이에요. 됐어요?”

“그런 거짓말은 안 믿습니다.”

 

그녀의 눈썹이 치켜떠진다.

 

“거짓말?”

“거짓말이죠. 그게 아니라면 그 친구가 인도로 갔다는 사실을 알았을 테고 그렇다면 여기로 찾아오진 않았겠죠. 당연히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테니.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거잖습니까?”

 

그녀는 내가 빠르게 얘기하자 멍하게 듣고 있다가 뜬금없이 ‘와아’ 하면서 박수를 쳤다.

 

“대단해요. 마치 셜록 홈즈가 얘기하는 거 같네요.”

 

그녀가 감탄하며 말했고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농담하고 싶은 기분 아닌데요? 도대체 당신은 누굽니까? 친구는 왜 찾죠?”

“그 사람이 인도에 갔다.... 돌아오긴 하나요?”

 

그녀는 내 말은 무시하고 혼잣말 하듯 그렇게 말했다. 내가 짜증나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을 안하자 그녀는 나를 흘낏 보고는 재밌다는 듯 말했다.

 

“너무 불안해하지는 마세요. 애인이라고 했던 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하여튼 그와 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은 아니에요. 아주 잘 알고 있는 사이죠. 그러니까 저는 이곳에 처음 온 사람도 아니고 이곳에 또 오지 못할 사람도 아니죠. 그리고 뭣보다도 저는 지금 너무 졸려요. 왜냐면 어제 한 숨도 잘 수가 없었으니까. 이유를 말하는 것조차 너무 힘들어요. 그래서 금방이라도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라 좀 잠을 자야겠어요. 저는 한번 잠들면 시체처럼 자니까 깨우지 말아줬으면 해요. 그럼 부탁할게요.”

 

그리고는 그녀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끌어 올리고는 내 쪽으로 등을 보이고는 잠을 자기 시작했다. 나는 황당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녀는 그녀 자신의 말처럼 너무나 졸려 보였기 때문에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이것 참.

나는 잠시 가만히 서서 이불 밖으로 나온 그녀의 뒤통수를 바라보다가 포기하고는 사우나라도 가야 되겠다고 생각하며 자켓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사우나를 나와 개운한 몸과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없었다. 나는 혹시 가버린 것일까 하고 생각을 했었지만 짐은 그대로 있었고 창가에 놓아두었었던 화분도 그대로 있었다.

옷을 대충 갈아입고 Radio Head의 CD를 틀려고 하는데 그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쇼핑이라도 하고 왔는지 양 손에는 봉지 가득 물건들이 들려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고 그럴듯한 미소를 한번 지어 보이고는 싱크대 쪽으로 가서 사온 물건들을 이곳저곳에 늘어놓았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냉장고 문을 열고는 한마디 했다.

 

“음, 정말 부실해 보이는 냉장고 속이네요.”

 

나는 한 숨을 내쉬고 말했다.

 

“저기요....”

“내 이름은 화연 이예요. ‘저기’ 가 아니라. 꽃 화(花), 예쁠 연(娟). 예쁜 꽃. 그럴 듯 하죠?”

 

못 당하겠군.

 

“좋아요. 화연 씨. 우리 잠깐 얘기 좀 하죠.”

 

그녀는 냉장고를 정리하며 나를 잠깐 보더니 빙긋 웃었다.

 

“좋죠. 저도 얘기, 대화 좋아해요. 그런데 조금 만요. 금방 끝나니까.”

 

나는 두 팔을 벌리며 자포자기의 표시를 하고는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실내를 울려 퍼지는 ‘Sail To the Moon'을 들으며 그녀가 움직이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어쩐지 그녀의 느긋하고 유연한 동작들이 음악을 따라 춤을 추는 무희의 동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장고에서 물건을 넣고 빼고 앙증맞은 주전자에 물을 따르고 가스 렌지를 켜고 오렌지를 코로 가져가 향기를 맡아보고 날씬한 과도를 움직여 껍질을 벗겨내고. 간결하고 기품까지 느껴지는 그런 춤동작.

 

“둥글레차를 좀 사왔어요.”

 

둥글레차?

 

“아뇨. 난 커피가 좋겠는데....”

 

그녀가 고개를 젓는다.

 

“몸에 안 좋잖아요. 이걸 마시세요. 향기도 구수하고 좋으니까. 그리고 오렌지도 있죠. 갑자기 신게 먹고 싶어 졌네요.”

 

어울리지 않는 조합. 이런. 이 여자는 내 식생활까지 몽땅 바꾸려는 속셈인가.

그녀는 2인용 식탁위에 먹기 좋게 썰어 놓은 오렌지와 찻잔을 올려놓고는 의자에 앉아 나를 쳐다봤다. 나는 한 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맞은편으로 가서 차를 마셨다. 구수한 느낌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자, 그럼 얘기라는 걸 해볼까요?”

 

그녀가 손에 턱을 괴고 나를 빤히 보며 말했고 나는 잠시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잠시 뒤 친구가 인도를 가면서 나에게 집을 맡긴 자초지종을 비교적 꼼꼼히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그녀는 가끔씩 차를 한 모금마시면서 내 얘기를 가만히 경청했다. 그리고는 내가 얘기를 끝내자 그녀는 잠시 시선을 돌려 창 쪽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듯 숨소리를 냈다.

 

“인도라....”

“그래요. 인도. 먼 곳이죠. 연락도 안돼요. 그렇다고 쉽게 왔다 갔다 할 수도 없는 곳이죠.”

“그 정돈 저도 알아요. 그런데.... 그는 그곳에 왜 간 거죠?”

“구체적으로 얘긴 안했습니다. 뭐, 여행이겠죠. 머리를 좀 식히고 싶다, 바람을 좀 쐬고 싶다, 견문을 좀 넓히고 싶다, 뭐, 그런 거.”

“혹은 도피?”

 

그녀가 불쑥 그렇게 말하자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런 것까진.... 모르겠군요.”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자 그녀는 눈을 감고 도인처럼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나는 이곳에서 지내려고 지방에서 올라왔어요. 그리고 전 서울에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어요. 유일하게 그 사람을 믿고 왔던 거였는데.... 지금 당장 갈 곳이 없으니 일단은 여기서 좀 지내야 될 것 같아요. 내가 할 말은 그게 다에요. 끝. 디 엔드 (The end)!”

 

나는 잠시 황당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내가 얘기를 꺼내려 하자 그녀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아, 안된다느니, 그럴 수는 없다느니 하는 소리는 마세요. 이곳은 어차피 그 쪽 집도 아니잖아요? 내게 나가라, 마라할 권리는 없다구요. 그리고 그 사람과 난 이정도 할 수는 있는 관계였어요. 그 관계를 그쪽한테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겠죠. 그러니까 이런 게 못마땅하다면 그 사람과 연락을 취해서 나와 연결을 시켜 주던지, 그게 아니라면... 그 쪽이 나가세요.”

 

나는 화가 치솟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뭐라 반박할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꼼짝없이 난 당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역시 그의 부탁을 넙죽 들어 주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서서 나를 보며 말했다.

 

“침대는 내가 써도 되겠죠?”

 

 

 

 

기묘한 동거가 어이없게 시작돼 버렸다.

 

 

 

나로서는 이런 문제로 타인과 옥신각신하는 것이 싫어서 금방이라도 ‘그럼, 내가 나가지’ 하고 싶었지만 현재의 나에게는 그럴 사정이 못 됐다. 여길 나가버리면 어디로 간단 말인가. 부모님께, 또는 그 밖의 다른 사람에게 이런 일로 비비적거리기는 정말 싫었다.

결국 난 그녀가 하자는 대로 고분고분 따랐고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중앙에 다른 원룸에서 쓰다 버린 파티션으로 그럭저럭 경계를 만들어 놓았다. 마치 베를린 장벽 같았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그렇긴 해도 난 여러 가지 불안한 요소들을 생각하자니 밤에도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우선 불편함이 늘 뒤꽁무니를 따라 다녔다. 반면 그녀는 그런 여러 가지 것들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쩔 때 보면 오히려 그녀가 원래 있던 사람이고 내가 불쑥 끼어든 불청객이 돼버린 느낌마저 들었다.

 

“이봐요.”

 

그날 밤, 내가 이런 저런 생각에 매트 위에서 뒤척이고 있으니 파티션 너머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괜한 심술이 솟구쳤다.

 

“미안하지만 내 이름은 ‘이봐요’ 가 아닌데요. 내 이름은....”

 

나는 분명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말해주었다. 그러자 ‘풋!’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고 그녀가 얘기가 들렸다.

“그래요. 미안하군요. 그나저나 그와 친구 사이라고 했죠? 희한하네요. 내가 알기론 그 사람 친구 같은 게 있는 사람이 아닌데.”

 

나는 그녀의 말이 좀 뜻밖의 얘기로 들렸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딨습니까? 친구가 없는 사람이라니.”

 

그러자 잠시 침묵이 이어지더니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아뇨. 그 사람 그랬어요. 친구에 대해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었으니까. 만나는 것도 내가 알기론 없었고. 그러니 이곳에 있는 당신을 보고 내가 놀란 것 아니겠어요?”

 

나로서는 잘 상상이 안 되는 그런 종류의 얘기였다.

 

“그와 친한가요?”

 

나는 잠시 우린 친한가? 하고 자문해 보다가 말했다.

 

“중학교 동창이에요. 그 이후로는 한동안 만나지 못했었죠.”

“그래요? 그런데 인도로 가버리면서 연락도 안하던 당신에게 연락을 했다는 말이군요?”

 

나는 그녀의 날카로운 지적에 다소 놀랬다.

 

“왜 중학교 이후로는 만나지 못했었던 거죠?”

 

그녀의 물음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계속 그러고 있자 그녀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대충 짐작은 가네요....”

 

나는 그녀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론 파티션에 가려 그녀의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왠지 그녀의 울적한 심정이 스르르 파티션을 타고 구렁이처럼 넘어오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다시 반듯이 누워 원룸의 어둔 빛깔에 물들어 있는 천정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짐작이 간다고...

 

 

 

 

중3 여름이 거의 끝나갈 무렵 나는 흔히들 얘기하는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었다.

상대는 같은 교회에 다니던 한 학년 아래의 여자애였다. 보통의 외모에 조용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그 여자애를 처음부터 좋아 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난 대체로 이성에 한 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 이성에게 한 눈에 반한다는, 첫 눈에 사랑에 빠졌다는 말을 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성욕이다. 동물적인 짝짓기의 본능적인 욕구일 뿐이다. 난 그렇게 생각했다. 내게 있어 사랑은 시간의 축적이다. 그것은 퇴적층을 파고 들어가 하나를 넘고, 또 하나를 넘어서 결국 발견해 내는 미지의 모험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퇴적층을 파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계기라는 게 필요하다. 감정적인 것이든 상황적인 것이든. 그래야 사람은 움직이는 것이다. 첫 눈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에 빠지기 위해 처음 제대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계기다. 그 계기는 극적으로 생길수도 있고 지극히 평범한, 아무것도 아닌 일에서부터 시작될 때도 있다. 그것은 알 수 없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마도 내 친구인 그는 사랑을 불합리하다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사랑은 그런 면을 가지고 있다.

내가 그 애를 좋아하게 된 것도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애와 나는 둘 다 교회에서 집이 좀 멀었다. 그래서 곧잘 버스를 함께 타고는 했는데 어느 날인가 비가 꽤 쏟아지는 저녁에 우리는 교회에서 성가대 연습을 끝내고 함께 버스를 타고 가게 됐다.

그 애가 내릴 정류장이 가까워 오자 나는 시간도 꽤 늦었었고 비까지 내리고 있었던 터라 그래도 남자라는 생각에 그 애를 집 앞까지 바래다주기로 결심하고 얘기를 건네 보니 그 애는 잠시 생각한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린 버스에서 내렸다. 서로의 우산을 들고 조용한 주택가를 가로등 불빛에 의지하면서 우리는 말없이 걷고 있었다. 추적추적 빗물에 운동화는 젖어버려 느낌은 찜찜하고 침묵마저 왠지 모를 어색한 기분이 들어 나는 몇 마디 쓸데없는 농담을 지껄인 것 같다. 그 애는 그저 조용히 웃기만 했다.

한 10여분쯤 걷자 그 애는 2층으로 된 고풍스런 주택 앞에 멈춰 서서 내게 다 왔다고 했다. 나는 그 애의 집을 잠깐 올려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들어가....”

 

그런데 그 애는 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나를 보고 어색하게 쳐다봤다.

 

“오빠, 잠깐....”

 

나는 그 애가 뭔가 내게 할 말이 있어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고 그대로 서서 그 애의 말을 기다렸다. 그 애는 비스킷을 놓고 이걸 먼저 먹을지 저걸 먼저 먹을지 고민하는 꼬마 애처럼 눈빛이 흔들리다가 곧 결심한 듯 내게 조용한 말투로 얘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난 그 애의 얘기를 가만히 경청했다. 그것은 일종의 고민 상담 같은 거였다. 그 애는 교회에 나온 지 이제 6개월여가 되어 가고 있었는데 아이들 속에서 자신이 겪고 있는 묘한 위화감에 대해 고민이 많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애는 그것에 몹시도 부담감을 갖고 있었다.

나는 꽤 어렸을 때부터 이 교회를 다니고 있었던 터라 그런 경우를 많이 봐왔고 겪었었기 때문에 그런 위화감을 잘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또래의 사람에게 얼마나 상처를 입히고 긴장하게 하는 지도.

내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그 애가 얘기하는 것은 꽤 진실한 얘기였다. 그리고 그것은 한 사람의 가슴 속에 은밀하게 담겨 있는 비밀스런 얘기 같기도 했다. 그 애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서 난 뭔가 내 내부에서 변화가 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애의 눈을 바라보면서 그 애의 얘기가 점차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나에게는 오히려 주위로 굵게 떨어지고 있는 빗소리, 골목을 뿌옇게 비추고 있는 가로등의 불빛, 그리고 주위를 흐르는 차가운 공기의 맑은 냄새, 그런 것들만이 생생하게 전달되어 오고 있었다.

나는 그 애에게 뭐라고 얘기를 했었다. 그러나 자신조차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 안에서 뭔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만이 강하게 신경 쓰였다. 꽤 긴 시간을 우리는 그렇게 함께 있다가 헤어졌는데 그 애가 들어가고 내가 다시 버스정류장을 향해 조용한 한 밤의 빗속을 걸어가고 있을 때 나는 확실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계기가 만들어져 버렸다고. 이유도 알 수 없는 불합리함. 그거였다.

 

 

 

 

칙칙.

어디선가 들리는 소음 때문에 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잠시 주위로 시선을 돌리면서 보고는 또 다시 낯선 이질적인 기운에 잠시 인상을 썼다. 아직도 적응이 안됐군. 나는 이불을 들춰내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파티션 너머로 그녀의 머리가 불쑥 올라왔다. 화연이라는 그녀. 그녀는 오른 손에 분무기를 들고 있었다.

 

“꽤 잠꾸러기네요. 벌써 10시가 넘었는데.”

 

내가 부스스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으니까 그녀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화분 쪽으로 다시 갔다. 그리고는 열심히 분무기로 물을 뿌리면서 화초에 식량을 공급하고 있었다.

휴.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일어서서 파티션 너머의 그녀를 바라봤다. 얇은 면 티에 무릎 위까지 내려온 반바지를 입고 상체를 숙인 채 물을 주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은 지금의 나 같은 남자에게는 너무도 자극이 컸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결국 이런 게 문제가 된다니까.

그녀는 내 시선이 느껴졌는지 고개를 돌리고는 똑바로 서더니 양 옆구리에 손을 얹고는 웃었다.

 

“뭐예요? 지금 엉뚱한 상상 하는 거예요?”

 

나는 재빨리 시선을 돌리고는 싱크대 쪽으로 가 주전자에 물을 담아 가스 렌지에 올렸다. 어느새 그녀가 내 뒤로 와 식탁에 털썩 소리 내며 앉았다.

 

“물, 내 것까지 되죠?”

 

나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CD플레이어 쪽으로 움직여 클래식 CD를 걸었다. 스트리아빈의 피아노 소나타. 정신 맑아지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주전자의 물이 끓자 찻잔을 두 개 꺼내고 또 다시 둥글레 차의 팩을 담았다.

 

“미안하지만 난 커피를 먹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그녀는 역시나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침부터 화를 내기가 싫어서 그냥 포기했다.

 

“무슨 일을 하죠?”

 

그녀가 다시 내게 묻자 나는 잠시 헛기침을 하고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무 일도 안합니다.”

 

그녀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킥’ 웃음을 지었다.

 

“꽤 자신 있게 말하네요.”

“자신 없을 것도 없죠.”

 

내가 퉁명스런 반응을 보이자 그녀는 창 밖을 바라보고는 벌떡 일어났다.

 

“나가서 식사라도 해요. 배고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는 주섬주섬 옷을 입고 외출준비를 했다. 난 아직도 잠이 들 깬 눈으로 그녀를 공허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는 최근 이곳으로 옮긴 나보다 건물근처의 지리를 더 잘 아는 듯 했다.

뒤편으로 이어진 후미진 골목길을 이리저리 이끌고는 정갈한 한식(韓食)당으로 데리고 가더니만 역시 알아서 주문을 하고는 마라톤 선수가 골인지점에 막 들어왔을 때처럼 잠시 숨을 고르고는 내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나는 수저와 젓가락을 셋팅하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여긴 자주 오던 곳인가요?”

“그 사람이랑 자주 왔었어요. 당신 친구. 은근히 식성이 까다로웠었는데 여기 음식은 맛있다며 잘 먹던데요?”

 

나는 이때쯤 물어보는 게 좋다고 생각하고는 말했다.

 

“그 친구와는 어떤 사인가요?”

“뻔 한 거 아니겠어요? 통속적인 사이. 그는 남자고 나는 여자고. 그렇게 남자와 여자가 통속적인 사이라면 뻔 한 거죠. 연락을 주고받고, 같이 여행도 다니고, 선물도 주고받고, 술도 먹고, 얘기도 나누고, 잠도 같이 자고.”

 

나는 잠시 그녀 얘기를 듣고 있다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지금은 헤어진 건가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는 잠시 서로의 생각에 조용히 몰두해 있다가 음식이 나오자 역시 묵묵히 식사를 했다. 누가 봤다면 식당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이 한 식탁에 동석해 있는 듯 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식사를 하면 뭘 할 건가요?”

 

내가 물었다.

 

“우체국으로 면접을 보러 가야 해요.”

“우체국?”

 

의외라는 듯 내 목소리가 커지자 그녀는 나를 빼꼼이 쳐다봤다.

 

“뭐, 문제 있어요?”

“아뇨.... 뭐 그냥.... 좀....”

 

그녀는 수저를 소리 나게 ‘탁’ 식탁위로 놓았다.

 

“그냥, 좀 어떻다는 거예요?”

“내말은, 그저 화연씨와는 어쩐지 어울리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말끝을 흐리자 그녀는 힘이 빠지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서서 자신의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탁자에 놓고는 그대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건 1인분의 식사비용이었다.

왜 화를 내는 거지?

나는 그저 아무렇지 않게 얘기한 것뿐인데 그녀가 좀 오버를 한다고 생각하고는 묵묵히 남은 식사를 마저 했다.

 

 

 

 

원룸으로 돌아오니 그녀는 이미 외출을 한 듯 보이지가 않았다. 대신 침대위에 옷가지들만 잔뜩 널려 있었고. 나는 한 숨을 깊게 내쉬고는 컴퓨터 앞에 앉아 내게 온 메일을 확인해 보고 뉴스사이트에 들어가 이것저것 기사를 검색하면서 살펴보았다. 오늘도 내 주위의 세계는 계속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내게는 아무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았다. 기묘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있는 곳은 지금 어딜까. 세상은 지금 많은 것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 난 현재 아무것도 생산하고 있지 않다, 라는 생각이 드니 왠지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는 없는 것이다. 슬슬 사회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마음은 있는데 몸이 쉽사리 움직여 주지 않는다. 깊은 심해에 누워있는 수장된 시체 같군. 지난 몇 개월 난 매일 매일 이런 생각을 반복하며 지냈었다.

인도로 간 그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문득 그의 모습이 떠올려 보았다. 아무래도 그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나와 같은 이런 상태로 있지 않을까 하는 짐작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 그의 원룸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고 아마도 그는 어디 힌두사원의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지는 않을까, 신빙성은 없는 공허한 상상.

 

 

저녁 6시가 좀 넘어 갈 때쯤 그녀는 버드와이저를 잔뜩 손에 들고 돌아왔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오늘은 같이 술이나 한잔해요.”

 

인연?

그녀는 오전에 보였던 모습과는 180도 달라진 태도로 그렇게 말하고는 단정하게 입었던 정장을 훌렁훌렁 벗어던지며 간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는 욕실에 들어가 양치질을 하고 세면을 한 후 나왔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군.

내가 싱거운 생각을 하며 식탁으로 가서 앉으니까 그녀는 맞은편에 앉아 나를 보고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버드 캔을 소리 나게 딴 후 건배도 없이 한 10년은 맥주를 마시지 못했던 사람처럼 벌컥대고 마셔 댔다.

나는 식탁에서 일어서서 전에 먹다가 좀 남아있던 감자칩을 꺼내 식탁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냉큼 하나를 집어 들어 입안에 넣고는 와삭 상큼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이제 차례가 됐다는 듯 나를 보며 말했다.

 

“하루 종일 뭐하고 지내요?”

하루 종일 뭘 했나.... 나로서도 좀 몽롱한 기분이었다. 나는 그냥 픽 웃고는 내 앞에 놓여있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는 크게 기지개를 켜고는 의자에 등을 편히 기대고는 다리를 올려 양반자세로 앉았다.

 

“우체국 면접은 잘 됐나요?”

 

이번엔 내가 묻자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럼 곧 여기서 나갈 수 있겠군요.”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말하자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내가 빨리 나갔으면 좋겠어요?”

“솔직히 이렇게 다 큰 남녀가 아무런 사이도 아니면서 한 집에 사는 건 좀.... 그렇잖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오해를 살 수도 있고....”

 

나는 내 말이 좀 모난 건 아닌가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는 의외로 내 말에 곧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겠네요.”

“아마 그렇게 생각할겁니다.”

 

그녀는 풋 웃고는 날 쳐다봤다.

 

“당신은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예정인 거죠? 여기 분명히 당신 집은 아니잖아요?”

 

나는 인정했다.

 

“그 친구가 돌아오면 난 언제라도 다른 곳으로 갈 겁니다. 그렇게 얘기가 된 거예요.”

“만약 그 사람이 안돌아오면?”

 

그녀가 무심히 그렇게 말하자 난 잠시 멍한 기분이 되었다.

 

“안 돌아 온다?”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요?”

 

나는 그녀가 얘기한 부분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한번도 그런 건 생각해 보지 않아서 잘 알 수가 없었다. 내가 혼란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자 그녀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캔을 천천히 흔들었다.

 

“그는 정말로 인도를 갔을까요?”

 

그녀의 그 말은 내 생각을 한층 복잡하게 만들었다.

 

“난 어쩐지 그가 인도로 가지 않은 것 같아요.”

 

그녀는 별 감정 없이 그렇게 말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내게 얘기했었어요. 1년쯤 있고 싶다고.... 물론 더 길어 질수도 있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기서 살 거라고는 얘기한적 없어요. 그리고 그렇게 가지 않았다면 그 친구가 도대체 어딜 갔다는 거죠?”

 

얘기하는 중에 다소 내 목소리가 커졌다는 느낌이 들자 그녀는 픽 웃었다.

 

“그냥 생각을 얘기한 것 뿐 이예요. 그렇게 흥분할 필요는 없어요.”

 

나는 나도 모르게 괜히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리고 맥주를 들이켰다. 그녀는 내 행동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자신의 남아있는 맥주를 마저 마셔버리고는 다른 캔을 땄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윤회의 나라....”

 

그녀는 종이에 써진 문구를 읽어내리 듯 메마른 목소리로 읊조리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이렇게 있는 것이 어색하고 싫어서 뭐라도 얘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 친구를 알고 지낸지는 오래됐나요?”

 

내 질문이 좀 뜻밖이었는지 그녀는 잠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자세를 바꿔 식탁에 팔을 기대고는 말했다.

 

“오래 됐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무슨 얘긴가요?”

“만약 물리적인 시간을 묻는 거라면 NO 예요. 하지만 다른 기준이라면.... 우린 오래된 사이죠.”

“어렵군요.”

 

난 조금 더 다가선 질문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친구와.... 헤어진 거죠?”

 

그녀는 역시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알고 싶어 하는 게 뭔지 짐작은 가요. 그와 난 헤어진 사인데 내가 미련을 못 버리고 일방적으로 그가 사는 곳으로 쳐들어 왔다.... 그런 거죠?”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굳이 부인하지 않고 인정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에 턱을 괴며 말했다.

 

“내 자신이 생각하는 건.... 우린 헤어진 건 아니에요. 뭐랄까, 그냥 서로가 완벽한 하나로 남아버리게 된 것일 뿐.”

 

결국 헤어졌단 얘기잖아?

내가 그렇게 맘속으로 생각하자 그녀는 가만히 미소를 짓고는 나를 쳐다봤다.

 

“그와 중딩 때 이후로 못 만났다고 했었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서로 연락을 안 했었던 거죠?”

 

나는 다시 묻는 그녀의 질문에 잠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내 표정을 보고는 다시 제안했다.

 

“만약에 그것을 내게 얘기해 주면 나도 그와의 일을 몽땅 얘기해 드리겠어요. 공평하게. 난 인간은 누구나 공평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나는 그녀를 잠시 쳐다보고 맥주를 마셨다. 아니. 난 얘기하고 싶지 않아. 그 일은.

내가 별 반응 없이 계속 가만히 있자 그녀는 잠시 후 내게 불쑥 물었다.

 

“산타모니카라고 알아요?”

“산타모니카?”

“산타모니카.”

 

나는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해변 이름 아닌가요? 그게 어디더라....”

 

내가 잠시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미국 LA에 있는 해안 지명이에요. 그곳에 가 본적 있어요?”

 

난 솔직히 아직 제주도도 못가 본 사람이었다. 내가 고개를 젓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좋은 곳이에요. 나중에 한번 가보세요.”

“가봤나요?”

“아뇨.”

 

그녀는 고개를 저었고 나는 다소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좋은 곳인지 압니까?”

“내가 가보고 싶은 곳이니까. 이름이 왠지 멋지잖아요. 산타모니카”

 

그녀는 멀리 창밖으로 보이는 어두운 빌딩의 꼭대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덧붙였다.

 

“만약 누군가를 만나고, 누군가와 헤어져야 한다면.... 바로 그곳이 내게는 가장 좋은 장소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인도를 갔고 그녀는 산타모니카에서 만나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잠시 멍하니 생각하다가 책꽂이를 뒤져 세계지도를 펼쳐보았다. - 어째서 나에게 이런 것이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

산타모니카와 인도.

지도상에서는 한 20cm 정도의 간격이었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먼 거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간격의 어디쯤에 바로 내가 있는 곳이 있었다. 나는 도대체 이 가운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앉은 채로 고개를 돌려 파티션 너머로 술에 취해 잠들어 있을 그녀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녀의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어쩐지 깊은 한숨 소리처럼 축축한 느낌의 어둠 속으로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저 여자를 떠올리고 있으면 어쩐지 자꾸만 그가 연결되어 떠오른다.

그와 나는 거의 10년이 넘는 공백을 가지고 있다. 왜 그런 공백이 생겼는지를 저 여자는 내게 물었다.

그와 나는 그런대로 친밀했다. 그리고 서로 죽이 잘 맞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관계의 사람이라도 어느 상황에서는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만다. 마치 흥행 실패한 비극처럼. 비극 위로 겹치는 또 다른 비극.

 

 

 

 

“널 좋아하고 있어!”

 

사춘기의 소년이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이런 얘기를 한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각오가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얘기하고 싶었다. 그것이 용기 있는 거라고 난 생각했다. 용기 있는 자가 미녀를 얻는다, 라고 난 그 나이 때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나이의 때의 난 사랑이라는 것을 갈구하고 있었다.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맞은편에 앉아있던 그 애는 ‘글쎄?’ 하는 듯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그 애의 반응을 긴장되게 보면서 왠지 부끄러워졌다. 애초에 내가 그리고자 하는 그림과 뭔가 어긋나 있는 것 같았다. 상황이 순정만화처럼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그 다음.

그 애는 조금 당혹스런 눈길을 내게 보냈다. 그때 난 사람이 심장이 떨린다, 라는 것이 이런 것이로구나, 라고 생각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나는 재빨리 상황의 타개책을 생각했다.

 

“그냥.... 얘기하고 싶었어.”

“....”

 

그 다음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왜 생각나지 않을까? 마치 영화가 점프 컷(주: 영화의 이야기나 장면이 갑작스럽게 다른 장면으로 바뀌게 되는 편집기법) 을 일으켜 뜯겨나간 것처럼.

고백이 있은 후 나에게는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무엇보다 그 애와의 만남이 잦아졌고 내게는 묘한 책임의식이라는 것이 자리 잡았다. 그렇게 누군가에게든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고 나면 말이라는 게 늘 그렇듯이 그 말에는 적당한 무게감이 생기게 된다. 일종의 책임감이다.

나는 상대의 페이스에 맞춰가면서 내 표현의 수위들을 조절해 나갔다. 질풍처럼 행동이 앞서는 시기였지만 난 앞서나가고 싶지 않았다. 보조를 맞추고 싶었다. 다행히 그 애 역시 그 후로 나에게는 호의를 보이고 친밀하게 대해 주고 있었다. 나는 하나하나 서둘지 않고 튼튼히 쌓아가고 싶었다. 절대 무너지지 않는 탑처럼.

그런대로 나는 충실했고 그 애와 친밀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나에게는 사춘기라는 넘어야 할 하나의 벽이 있었고 우리들은 어쩔 수없이 많은 제약이 따르는 학생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난 만족했다. 시간은 많은 것들을 변하게 한다. 우리도 조금씩 변해 갈 것이고 그 속에서 우린 많은 것들을 알아갈 것이다. 함께.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그 시기의 사랑이었다.

 

 

 

 

날씨가 우울했다.

금방 비라도 쏟아지지 않을까 마치 폭풍전야처럼 하늘은 우중충했는데도 이상하게 기상예보에서는 비가 오지 않을 거라고 장담이라도 하듯 햇빛표시가 초롱초롱 떠 있었다.

뭘 믿어야 하는 건지.

내가 지금 날씨에 계속 관심을 갖는 이유는 내가 오늘은 모처럼 만의 외출이라는 것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비교적 여느 때보다 일찍 일어난 나는 조용한 주위를 보고 그녀가 어디 나갔나, 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파티션 너머로 그녀의 -엄밀히 얘기하면 나의, 아니 그의- 침대 위를 살폈을 때 그녀는 이불을 머리까지 푹 뒤집어쓰고 누워 있었다.

오늘은 나갈 일이 없는가 보군.

난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는 욕실로 들어가 담배를 한 대 태우며 일을 보고 이를 닦고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와 옷을 갈아입고 외출준비를 했다. 그때까지도 그녀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설마 어떻게 된 걸까라고 까지 생각하면서 유심히 봤지만 그녀는 아까와는 다른 자세로 여전히 이불을 뒤집어 쓴 채로 누워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난 그냥 그녀가 어제 과음을 한 탓이려니 생각하고 현관 쪽으로 가서 신발을 신었다. 문득 나가기 전에 그래도 뭐라고 얘기라도 하는 게 좋겠다 싶어 난 그녀가 누워 있는 쪽을 향해 조금 큰 소리로 말했다.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별 수 없군.

나는 현관문을 열고 문도 잠그지 않은 채 긴 복도를 걸어갔다.

 

 

 

 

사람들과 몰아서 한 약속을 겹치기 하는 배우처럼 이리저리 휩쓸리며 대충 마무리가 되었을 때는 꽤 늦은 시간이 이었다. 많은 거리를 이동했던 터라 몸도 피곤하고 마지막 약속에서는 술도 한잔 하게 되서 꽤 지친 상태였었는데 집으로 출발 할 때쯤에는 비까지 쏟아지기 시작했다. 결국은 우산도 가져오지 않아서 쫄딱 젖어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 서든 조금이라도 들 맞겠다고 뛰어 다니고 건물로 들어와 몸을 털고 야단을 쳤지만 이미 머리와 옷에는 깊숙하게 빗물이 베어있었다.

키로 문을 따고 원룸 안으로 들어왔을 때 원룸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어라? 나간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무심히 전등 스위치를 올렸는데 불이 켜지고 보니 그녀는 창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흠칫 놀라며 그녀에게 코멘소리를 했다.

 

“뭐예요? 있었으면 불이라도 켜 놓지.”

 

나는 내 구역 쪽으로 와서 겉옷을 벗고 그녀 쪽을 바라보는데 그녀는 창가에 서서 두 팔을 창밖으로 쭉 뻗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는 그녀가 가져왔던 화분이 들려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녀가 화분을 창밖으로 떨어뜨리려 하는 걸로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12층이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화분은 어쩐지 위태위태해 보였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나는 깜짝 놀라 소리치며 그녀에게로 가 거칠게 그녀를 안으로 끌어 당겼고 그녀는 힘없이 뒤로 밀려나왔다.

나는 재빨리 화분을 뺏어서 창틀에 올려놓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에게 호통을 쳤다.

 

“여긴 12층 이예요. 누가 맞기라도 하면....”

“오해 말아요. 그저 물을 주고 있던 것뿐인데....”

 

그녀의 목소리가 어딘지 촉촉하게 들려왔다.

천천히 고개를 들고 나를 보는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고 이미 꽤 오래 운 듯 양 볼에는 고랑처럼 눈물이 흐른 자국이 나있었다.

나는 잠시 입을 벌리고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를 원망스런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별 수 없이 나는 그녀에게 그와 중학교 시절에 있었던 얘기들을 하나하나 들려주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그래야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나는 그녀가 내게 뭔가 풀어 놓기를 저 마음 깊숙이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내 얘기를 들려줌으로써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대한 얘기를 하다보면 결국은 자연스럽게 그와 왜 내가 연락을 두절 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얘기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참으로 단순한 상황이었다.

 

“너에겐 어울리지 않는 애야!”

 

그는 꽤 완고하게 내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에게 그 얘기를 들은 것은 내가 그 애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하고 한 6개월이 지날 때쯤이었던 것 같다. 그와 내가 자주 붙어 다니다 보니 지극히 자연스럽게 그 애와 셋이 어울릴 때도 많았었는데 처음 그런 일이 있고나서 그는 곧바로 내게 그 애가 없는 자리에서 그렇게 얘기를 했었다. 내 감정을 생각한다면 화를 낼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때의 난 단순히 이 녀석이 괜한 시샘을 하고 있군, 하고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 당시 그에게는 여자 친구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그런 감정도 없었을 때였다. 그렇긴 해도 그러고 싶다, 라는 마음마저 없지는 않았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여자 친구와 이런저런 일을 하는 게 나름대로 눈꼴시었을 거였고 그래서 그런 얘기를 하는 거라 여겼다.

 

“너에게 어울리는 여자는 내가 잘 알아. 그런 여자를 찾아 줄 수도 있어. 하지만 아무리 봐도 걘 아냐.”

 

계속해서 그런 얘기를 반복해 들으니 나로서도 은근히 부아가 나 딱 한번 큰 소리를 쳤던 적이 있긴 했다. 그래도 그는 그런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다. 나도 지쳐서 그래, 니 멋대로 해라, 하고 포기해 버렸다.

파국은 어느 날 밤인가에 찾아왔다. 그리고 그날은 얄궂게도 발렌타인 데이였다.

그날 저녁 나와 만난 그 애는 내게 예쁘게 포장된 초콜렛 상자를 건네 줬었고 난 너무도 기뻐 마치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런대로 분위기를 잡아가며 우리는 오붓하게 스파게티 전문점에서 그럴듯한 식사도 나누고 헤어졌다. 그런데 나중에 집에 오다보니 그 애의 다이어리가 쵸콜렛 상자가 들어 있는 쇼핑백에 담겨져 있는 것을 알았다. 그 애가 꽤 애지중지 아끼는 거였는데 들고 다니는 게 무거워 보여 내가 잠깐 넣어두라고 한 것을 그 애도 나도 잊고 있었던 거였다. 시간이 아직 여유로워 나는 이걸 핑계 삼아 얼굴이나 한번 더 봐야 겠다 생각하고는 그 애의 집 앞으로 갔다.

그 애의 집골목을 나오면 바로 공중전화가 있어서 난 그곳에서 연락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공중전화로 향해 가는 길 한 쪽에 위치한 공원을 지날 때에 희미한 가로등이 비치는 벤치 아래에서 난 두 사람을 보게 되었다. 난 그들이 누군지 한번에 보고 알아챌 수 있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바로 전등불빛 아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잘못 본 건 아닐까 애써 의구심을 가질 게재도 없었다. 정확히 그와 그 애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전등 아래서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숨죽이며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지면보다 한 1m 정도 놓은 지대에 위치해 있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너무도 키스에 열중하고 있어서 그랬는지 그들은 내가 서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키스를 나누고 있었는지도 알 길이 없었다.

나는 조용히 몸을 돌리고 걸어갔다. 마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몸속에 들어와 나의 몸을 움직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나는 계속 그런 내 속의 이질감을 느끼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 날부터 나는 학교에 며칠을 나가지 않았다. 아마 적당히 병가로 해서 그랬었던 것 같은데 그때 학교를 가지 않고 내가 뭘 했었는지는 지금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그 일이 있은 후 난 그 애와도, 그리고 그와도 모든 연락을 끊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그들도 나와 연락을 끊었다.

 

 

 

 

 

그녀에게 그런 일련의 과정을 쭉 얘기하다 보니 어쩐지 이것은 나의 얘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나에게 타자화(他者化) 된 나. 그렇게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때의 상황들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꽤 오래전부터 그래왔던 것도 같다. 이것이 바로 시간이 약이라는 걸까. 어쨌든 무덤덤한 뉘앙스로 나는 그녀에게 그런 생각들을 말했다. 그녀는 내 얘기를 묵묵히 듣고 있었는데 얘기를 하다 가끔 그녀가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얘기는 끝났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와 왠지 모를 묘한 유대감이 생기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앞서고 뒤서고는 있지만 우리는 그로인해 상처를 입었다. 아마도 평생을 지고 가야할 상처. 경중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나만 보더라도 나에게 있어서 과거의 그런 일은 지금은 별로 영향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내게 있어서 상처가 되었다.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도 조금 시간이 흐르면 지금의 나처럼 상황을 받아들이게 될까? 알 수 없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으니까. 상처와 사람, 너무나 많은 경우의 수가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은.... 그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나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있다가 다시 말했다.

 

“그 사람.... 아주 나쁜 사람이군요.”

 

그리고는 그녀는 또 다시 눈물을 흘렸다.

 

 

 

 

새벽쯤에 - 그냥 새벽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는 - 그녀는 내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어떤 맥락에서 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잠결이었고 그냥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고 생각했다.

이불 속으로 들어온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이 내게 전달되어 왔다. 그녀는 알몸이었다. 아니, 알몸 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의식이 깨었다, 잠겼다 하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이것이 과연 현실인가.... 잘 판단이 서지 않았다. 어느 순간 나도 알몸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순식간에 알몸이 되어 버리다니 이건 도무지 현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뱀처럼 부드럽게 움직여서 내 몸 위로 올라왔다. 그녀의 전신에서 느껴지는 포근하고 부드러운 감촉은 또 다시 몽환적으로만 느껴졌다.

난 꿈을 꾸고 있는 거야.

확신이 들었다. 그래도 어쨌든 내 성기는 크게 굳어져 있었고 곧 그곳을 감싸는 촉촉한 감촉이 전달되어 왔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솔직히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조차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나는 팔을 움직여 그녀의 등을 감쌌다. 매끈한 등의 감촉이 손끝으로 느껴져 왔다.

그녀는 느리게 내 몸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무성영화처럼 너무도 조용했다. 우리는 둘 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었다.

우리 산타모니카에서 만나요...

멀리 머릿속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는 장소에서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를 만난다면 우린 그곳에서 만나야 하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이 마치 예정된 예언을 이루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예언은 자꾸 반복 되고 있는 것이다.

그곳이 우리가 만나야할 장소예요....

목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그리고는 모든 것이 점차 어두워져 갔다. 마치 영화의 페이드아웃처럼.

 

 

 

 

아침에 눈을 뜨고 깨어났을 때, 물론 미리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어질러놨던 옷가지들도. 그녀가 잠깐이지만 벌려놓고 썼던 모든 물건들도. 파티션 너머로 우직하게 자리 잡고 있는 침대는 그동안 아무도 쓰지 않은 골동품처럼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지금의 주위를 둘러본다면 과연 그녀가 이곳에서 생활을 했었나, 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모든 것이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이곳에 있었다. 그것은 창가에 놓인 화분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유일하게 화분만은 놓고 가버린 것이다.

나는 혹시나 그녀가 무슨 메모라도 남겨 놓지 않았을까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나서는 난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모든 것은 또 남겨진 자가 생각해야할 몫인 것이다.

새벽에 그녀와 가졌던 성교는 무엇일까.

깨어났을 때 난 옷을 입고 있었다. 전혀 내가 입은 기억이 없다. 그리고 내가 누워있던 자리에는 그 어떤 성교의 흔적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꿈이었나.... 그것도 확신이 가진 않았다.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나는 모든 생각을 덮어버리기로 했다. 이런 건 머릿속에서 생각만 굴려봐야 아무것도 얻어지는 게 없다. 생각은 그저 생각으로 끝날 뿐. 아무것도 실체는 없다. 무의미한 짓인 것이다.

 

 

 

 

하루가 지나갔다.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나간다....

 

 

 

 

그녀는 이른 아침의 산타모니카의 해변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에선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슬퍼하고 있는지, 아니면 기뻐하고 있는 것인지. 어느 순간, 그녀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곳엔 내가 서 있었다. 그곳에서 난 아무도 만날 수가 없다. 하지만 난 그곳이 그녀가 얘기한 것처럼 누군가를 만나고 누군가와 헤어지는 가장 좋은 장소라는 것은 왠지 알 수 있다.

그곳에 서서 난 그에 대한 생각을 한다. 그는 인도에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아마 어렴풋이 나는 처음부터 느꼈으리라 생각이 든다. 그 윤회의 나라에서 그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떠난 거라고. 그는 죽으러 간 것이라고. 아니, 환생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를 산타모니카로 이끌어 간다. 누군가와 만나기를 바랬던 것일까?

그 애는 너에게 어울리지 않아...

어쩌면 우리가 처음 만난 그 폭력의 골목길에서 그는 나라는 인간의 본질을 바로 알아채버린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내게 맞추어져 있는 그 모든 것들을. 그리고 그는 그녀를 만나면서 그녀에게 맞춰져 있는 것도 알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그는 이제 나와 그녀를 만나게 함으로써 자신의 재생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젓는다. 그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그건 이기적인 것이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다. 나는 인정하지 못한다.

나는 그녀를 생각했다. 그를 배재한 그녀를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기다리기로 한다. 그리고 느낄 수가 있었다. 긴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면 그 해변 가에 아마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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