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굽는 아침
막 잠에서 깨어나 흐린 하늘도 이렇게 눈부실 수 있다는 것을 안건 창문 틈으로 밖을 문득 바라보았을 때였다. 눈이 부셨다. 대부분 화창한 맑은 하늘이 눈부실 거라고 생각을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닌 것이다. 이렇게 흐린 날도 때에 따라서는 눈이 부시 기도 한다.
난 어제도 어김없이 그녀의 얼굴을 진열장 유리너머로 지켜보았었다. 그 여운이 이렇게 아침까지도 계속 머리 속에 남아있는 듯 하다.
그녀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나는 예전부터 이성에게 첫눈에 반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난 그녀를 처음으로 보고 난후에 인정하기로 했다. 대체로 이성의 존재에 있어서 둔감하게 여기곤 했던 나로서도 그녀를 보고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집 맞은편에 제과점이 문을 연 것은 채 일주일이 되지 않는다.
애초에 그 자리의 시작은 아마 피자배달을 전문으로 하는 피자가게였었다고 기억하는데 아무래도 이 동네에서는 피자라는 지극히 서구적인 음식은 사람들이 잘 찾지를 않으니 결국 비디오 가게로 전환이 되었었는데 역시 한 반년을 채 버티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가까워서 먼 곳까지 비디오를 빌리러 가야하는 수고를 덜었었는데 아쉬웠었다.
하긴, 대신 폐업처분으로 소장하고 싶던 테잎을 싸게 내놓아 맘껏 싼 가격에 살수가 있었던 것은 좋았지만. 그 테잎들을 아직도 심심할 때면 즐겨본다. 보고 있으면 공연히 긴장을 일으키는 ‘양들의 침묵’, 나른한 일상의 지루함을 느끼게 하는 ‘톰 행크스의 볼케이노’ , 배우들의 연기도 좋고 몇 번을 봐도 아름답고 유쾌한 사랑이야기인 ‘프랭키와 자니’ 등등.
그 다음은 분식집이었는데 그곳은 나도 가끔은 이용하곤 했던 기억이 있다. 비교적 라면을 꽤 정성들여 끓여주던 50대 아주머니가 주인이었는데 그 외의 음식은 어땠었는지 난 라면이외에는 먹어 본적이 없기 때문에 뭐라 얘기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 분식집 역시 석 달을 넘기지 못한 것을 보면 그렇게 변변치는 못했나 보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게 아니라면 모든 장사의 중요사항인 그곳의 자리가 변변치 못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사는 곳 맞은 편 이라고는 하지만 그곳에서 뭘 사람들에게 판다라는 건 장사에 문외한인 내가 보더라도 여간 녹녹치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을 듯 싶었다.
하루 동안의 통행인들의 수도 현격하게 적을뿐더러 그곳은 한낮의 내내 늘 음지로만 그늘이 져있어서 눅눅함이 보기만 해도 몸으로 느껴지는데 그곳에서 뭘 먹는다는 생각을 하면 당장 잔뜩 곰팡이가 생긴 음식이 나오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니 잘 될 리가 없지 않겠는가?
어쨌든.
분식집이 없어진 이후도 한동안은 굳게 철문이 내려져 있었는데 한 달 전 내장을 새로 하는지 인부들이 들락거리고 자재들이 쌓여있고 하더니 어느 날 뿅 하고는 빵 가게, 즉 제과점이 생긴 것이었다.
그 빵 가게는 ‘빵 굽는 아침’이라는 느낌이 썩 좋은 간판을 달고 있었다.
빵 굽는 아침..... 아닌 게 아니라 그 빵 가게는 아침이면 늘 빵을 구웠다.
내가 이렇게 확신을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그 가게가 생긴 이후로 아침이면 늘 그 빵 굽는 냄새로 인해 잠을 깨게 된다는 사실이다.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아침에는 무척 선선한 날씨로 인해 자취방의 온 창문을 꼭꼭 닫고 잠을 자는데 빵을 굽는 그 향기는 어딘가 알 수 없는 틈새로 아침의 폭주하는 잠을 꼭 멈추게 만들어 나를 못 견디게 만든다.
더욱 견딜 수가 없는 건 그 냄새가 사람을 못 견디게 할 정도로 허기지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가게가 생긴 이후로는 꼬박꼬박 아침을 먹게 되는 버릇이 생겼다. 문득 숟가락을 움직이다가 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마력!’
그랬다.
그 가게의 빵 굽는 향기는 그런 힘을 갖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녀를 처음 대하게 된 건 물론 그 빵 가게의 안에서였다.
어느 날 아침, 그날도 역시 난 빵 굽는 냄새로 침대에서 뒤척이다 허기를 못 견디고 벌떡 일어나 눈에 보이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먹어보려고 하는데 그날은 정말로 먹 거리가 될만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가 않은 것이었다.
밖에 나간다는 것도 귀찮고 무언가를 사러 나간다는 것도 귀찮기가 그지없었다. - 정말로 아침부터 잠에 들깬 얼굴로 슈퍼를 간다는 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싫은 일인 것이다 -
하지만 결국은 허기를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나로선 빵을 사먹기로 하고 가게로 들어갔다.
가게 안에는 아직은 진열이 채 되지 않은 갓 구워낸 빵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그리고 각각의 빵에서 풍겨 나오는 그 뭐라 말할 수 없는 사람의 허기를 심하게 자극하는 냄새들이 온 가게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가게 안을 들어가서 채 30초도 되지 않아 주방으로 보이는 쪽에서 그녀가 나왔다.
“뭘 찾으세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 그리고 하얀색 롱스커트에 커다란 주황색 고양이가 그려진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그녀를 처음 봤을 때 난 그녀가 왠지 넓게 펼쳐진 초원에서 따뜻한 숨을 헐떡이며 막 달려온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소 어이없는 생각이었지만.
그녀는 가득 들고 나온 고로케들을 진열창에 놓고는 앞치마에 손에 묻은 기름을 닦으며 나를 보고 방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순간 난 아름답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저... 빵을 좀 사려 구요.”
“네... 좋아하시는 걸 골라보세요.”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나에게 자유로운 선택권을 주었다.
보통의 상점에서 종업원들이 ‘이건 어떠세요?’ ‘어떤 걸 찾으시나요?’하면서 부담을 주는 행위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 건 정말로 나 같은 사람에겐 짜증스런 일이다. 그래서 난 사실 안심했다.
하지만 반면 난감한 점도 있었다.
나는 그리 빵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실 빵이 어떤 종류가 있는지도 잘 모른다.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은 난 팥이 든 빵은 절대로 못 먹는다는 사실이다.
“팥이 안든 게 어떤 게 있나요?”
난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그녀는 내말에 다시 봄바람 같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진열된 빵들을 하나하나 보았다.
“팥을 싫어하시나 보네요?”
“네... 좀...”
“그럼 이걸로 한번 드셔보시겠어요?” 하며 그녀가 가리킨 것은 방금 그녀가 들고 나온 고로케였다.
“저희 가게에서만 특수하게 만드는 고로케에요. 한번 드신 분들이 많이 찾으시더라구요....”
이를테면 독자적인 제품이란 얘기였는데 겉보기에는 여느 고로케와 크게 달라 보이는 것은 없었다.
“한번 드셔보세요.”
“네? 여....여기서요?”
“네.”
별것은 아닌 일인데도 나는 좀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나의 반응을 살피는 눈은 마치 초등학생이 실험에 열중하는 듯 한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었고 나는 나대로 왠지 그녀가 들고 있는 그 고로케가 유난히 먹음직스러워 보여서 슬며시 손으로 붙잡아 약간만 베어 물었다.
오물오물.
대단한 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고로케가 맛있던 때문이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확실히 그 맛은 기가 막혔다. 뭔가 독특하고 입맛을 계속 당기게 하는 그런 맛 이였다.
“음... 정말 맛있네요.”
열심히 고로케를 입안에서 씹고 있는 내 표정을 살피던 그녀는 내말에 시험에서 100점 맞은 학생처럼 천진한 표정을 지으며 기분좋아했다.
그러자 난 그녀와 나사이의 공기가 굉장히 느슨해져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헌데 이상한 것은 다음이었다.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점점 얼굴에 표정이라는 것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다음엔 마치 이제 볼일 다 봤으면 꺼져, 하는 듯한 얼굴을 지어보였다.
난 순간 당황해서 재빨리 빵을 챙겨 가지고 계산을 한 후 밖으로 나왔다.
집으로 들어가기 직전 그녀의 모습을 힐끔 유리창사이로 보니 그녀는 좀 전과는 또 다른 환한 얼굴로 노동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표정이 되어있었다.
방으로 돌아와 난 잠시 멍하게 있었다.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순식간에 뒤바뀌는 그녀의 주변의 공기는 그대로 내게로 전달이 되어왔고 나에게 있어선 그런 경험은 일찍이 없었던 것이었다.
사람이 저렇게 순식간에 변화하다니....
그녀와의 처음은 이렇게 기묘했다.
그렇지만 난 묘하게도 그녀를 좋아하게 됐다. 아니, 정말로 별안간 사랑에 빠져 버렸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런 느낌이 정말 있었어! 이상하고 어이없다는 생각은 했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그런 마음이 생긴 이후로부터 외출했다가 그 빵 가게 앞을 지날 때면 난 창 너머 안에 다소곳이 있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내가 그녀를 얼마나 좋아하게 됐는지를 사무치게 느끼고는 했다.
물론 난 그이후로도 그곳에서 몇 번 빵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처음 갔을 때와 같은 친근함도 갑자기 바뀌었던 차가움도 이후에는 없었다. 그녀는 그저 여느 손님과 같게 지극히 접대적인 말투와 표정으로 나를 대했다.
하지만 난 달랐다.
내가 원하건 원치 않건 그녀와 있을 때에 나의 그 말투나 모든 제스처에는 뭔가 느낌이 있었다. 나의 마음과 몸은 알게 모르게 그녀에게 구애라는 것을 은연중에 하고 있다는 것을 내 자신이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녀도... 역시 그것을 느끼고,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나의 그런 생각은 맞았다.
사람의 감정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몸짓 또는 말의 뉘앙스 같은 것에서 풍겨 나온다.
물론 그것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있고 잘 드러나는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어떤 식이든 상대방에게 미세하게 포착 될 수 있는 느낌이란 게 있다. 역시 사람 중에는 그것을 잘 포착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실로 빵 종류만큼이나 사람은 가지각색이다.
어느 날 새벽, 아마도 난 전날 친구와 -누군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술을 먹고 들어오고 있었던 것 같다.
숙취에 동이 터오고 있는 하늘을 배경으로 둥실둥실 걸어오고 있는데 막 빵 가게가 있는 골목으로 돌아서니 그녀가 있었다.
너무나 순간적으로 난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그녀는 바닥에 앉은 채 막 잠겨있던 자물쇠를 풀고 철문을 밀어 올리려는 자세에서 갑자기 나타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린 것이었고 난 나대로 모퉁이를 돌아서며 정면을 바라본 것뿐인데 우린 절묘하게 서로의 눈으로 시선이 가버린 것이었다.
한 3초간 우리는 각자가 하던 행동을 멈춘 채 그렇게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외였다. 곧 그녀는 내 시선을 먼저 외면하고 철문을 쇳소리와 함께 열어젖혔고 난 잠시 멍한 채로 서있었다.
그녀가 다시 가게 문을 키로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할 때 나도 모르는 용기가 솟구쳤다. 아마도 술기운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 분명 그랬다.
“저기요... 잠깐...”
내말에 그녀는 멈칫하고 나를 힐끔거리듯 바라봤다. 그리고는 주위를 경계하듯 살폈다. 꼭 죄를 짓고 있는 사람마냥.
나로서도 일단 불러 세우긴 했는데 뭔가 다음에 얘기할 것이 뭉게뭉게 떠오르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저기...”
그녀는 불안해 보였다.
“...좋아합니다.”
불쑥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난 솔직히 속으로 ‘으악’소리를 질렀다. 이런 식은 아냐, 이 멍청아!
그런데 순간 내말에 그녀는 쿡 웃음을 지었다. 어라?
그다음 그녀는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고는 다시 한번 나를 향해 방긋 웃고는 그대로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순간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그녀를 따라 들어가 뭔가 그녀에게 대답을 요구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물러서서 그대로 가버려야 하는 것인지 그렇게 갈등하는 짧은 순간 결론은 찾아왔다.
“저, 실례하지만...”
묵직한 굵은 음성에 나는 뒤돌아보았다.
30대 중반쯤의 평범한 옷차림의 사내가 부처님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향해 있었던 것이다.
“무슨 볼일이 있으신 건가요?”
그는 빵집을 손으로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뭐라 딱히 대답할말이 떠오르지 않아 우물거리고 있으니 사내는 공손히 다시 내게 말을 했다.
“빵이 나오려면 한두 시간 더 있어야 하는데 그때 오시겠어요?”
나는 별 수 없이 숨을 길게 내쉬고는 그러마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는 맞은편 건물로 향하는데 뒤에서 사내가 광고카피를 제창하듯 말했다.
“갓 구운 빵은 맛이 기가 막힙니다. 이따 꼭 오세요.”
아마도 저 아저씨가 빵 굽는 아침의 주인인가보다.
눈부시게 떠오르고 있는 태양을 보고 찡그리며 난 그렇게 생각했다.
전혀 생각지 못한 누군가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상대방에게는 무척 당혹스런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걸 설문조사해서 통계를 내 본적은 없지만.
그녀의 반응이라는 것을 곰곰이 되짚어 생각해 보았다.
물론 새벽에 먼동이 터오는 시간에 술 냄새를 풍기며 다소 어이없게 고백을 해버린 말이지만 진실된 말이었다고 나는 확신했다. 그리고 그런 내말에 그녀는 웃어보였다.
사람이 어떤 말에 웃어보였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할 수가 있다. 그런데 아까 보여줬던 그녀의 미소의 의미는 좀처럼 짐작이 되지 않는다.
휴. 난 머릿속에 전선들이 또 엉켜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대체로 사람의 표정이라는 것의 의미는 이런 걸 갖다 붙이면 이렇고 저런 걸 갖다 붙이면 저런 것이다. 영화의 몽타쥬 기법 같은 것이다.
가장 확실한 것은 그녀의 생각을 들어보는 것 이다.
빵 가게로 들어갔을 때 그녀는 의자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흘낏 봤을 때 그것은 원색적인 그림이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는 동화책 같았다.
동화책? 참으로 특이한 여자다.
내가 들어갔을 때 그녀는 별 반응이라는 것이 없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침착하고 친절하게 나를 맞았다.
뭔가 좀 특별한 반응이 있을 것 이라는 상상이 어긋나자 좀 실망되기도 했지만 뭐라 얘기를 꺼낼까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그녀가 빵을 불쑥 내밀었다.
“이 빵 한번 드셔보시겠어요?”
나는 잠시 그녀를 쳐다보다가 빵을 받아들었다. 그러고 나서 난 아까의 얘기를 다시 해보려고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왠지 지금 여기서 그런 얘기를 꺼내기가 몹시도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어쨌든 여기는 그녀의 직장이다. 직장에서 그런 얘기를 나눈다는 것은 적합하지가 않는 것 이다.
“그럼...”
나 역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인사를 하면서 빵을 가지고 나왔다.
잠시 나는 밖에서 유리너머로 다시 의자로 가서 책을 읽고 있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녀는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그런 신비한 구석을 지니고 있다. 다시 한번 머리에 강하게 드는 생각이지만 그녀는... 그녀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을 행복감에 젖게 만든다.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이렇게 소리 없이 내리는 비를 보는 것이 꽤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넓은 카페의 창가에 앉아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그것도 혼자서.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어색했지만 알 수 없는 행복감이 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사람을 만날 약속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물끄러미 창밖으로 소리 없이 내리는 비를 보면서 자꾸만 미소가 흘러 나왔다. 주위에 간간히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볼 테면 보라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난 지금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 이니까. 너희가 그녀를 알아?
오늘 아침 난 그녀의 쪽지를 받았다.
또다시 밀려드는 이른 아침의 빵 냄새에 참을 수 없는 공복감을 느낀 나는 어제 산 빵을 미친 듯이 게걸스럽게 베어 물었었다. 그리고 무언가 빵과는 다른 이물질이 어금니로 물려짐을 느꼈다. 종이였다.
이빨에 짓눌린 빵 조각들을 떨어내고 접혀있는 종이를 조심스럽게 폈을 때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내일 저녁 9시 역 근처의 파블로라는 카페에서 만나요.’
시계를 보았다. 9시 5분.
“미안해요.”
갑작스레 그녀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며 나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 했다. 소리 없는 비처럼 그녀가 소리 없이 나타난 것이다.
“좀 늦었네요...”
“아뇨, 저도 방금 왔는걸요.”
하얀 거짓말. 주책 맞게도 난 거의 한 시간 전부터 나와 있었다.
뛰어온 듯 맞은편 소파 (이 카페의 의자는 거의 소파 수준이다) 에 앉아서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과일 쥬스를 주문하고는 잠시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창밖을 바라보았다.
“혹시 쪽지를 보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고민 했었어요.”
그녀가 쑥쓰러운 표정을 보이며 말했다.
“네... 마치 스파이 영화 같았습니다.”
그녀는 내말에 또 미소를 지었다. 성공!
무엇이든 계속 얘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비 좋아하세요? 우산을 가지고 나올까, 말까 고민했어요. 비 오는 날을 싫어하지는 않는데 이런 비 오는 날은 정말 헷갈려서..... ”
“절 좀 구해주세요.”
그녀가 나의 말을 끊으며 그렇게 얘기를 했다.
나는 잠시 그녀가 방금 얘기한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네?”
“절 좋아하신다면 절 좀 구해 달라 구요.”
“무슨...?”
“전 지금 붙잡혀 있어요.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가 없어요. 절 좀 도와주세요.”
그녀는 금방 눈물이 쏟아질 듯한 눈빛으로 날 보며 말했다. 난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졌다. 이런 내가 상상했던 대화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그러니까...”
난 그녀를 손으로 가리켰다.
“인경, 정인경이예요. 그러니까 내 이름...”
“네... 그래서 인경씨는 붙잡혀 있다구요?”
“그래요.”
현실감각이 달아나는 느낌이다. 무슨 얘기부터 해야 하는 건지 난해하다.
“믿지 않는 군요. 내말을.”
그녀는 자신의 가방을 들고는 일어나서 출입구 쪽으로 걸어가려 했다. 순간 난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처음부터 순서대로 얘기해 봐요. 내가 이해하기 쉽게...!”
“6개월 전 저는 제빵 학원에 다니고 있었어요. 물론 빵을 만드는 일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었죠. 전 어렸을 때부터 정말 빵을 좋아했어요. 아빠는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저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저희 어머니는 제과점을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어렸을 때 정말 많은 빵들을 보고, 먹으면서 클 수 있었죠. 제과점은 벌이가 신통치 않아서 결국 한 1년여 만에 문을 닫았지만 전 그때 내 주위에 있었던 그 많은 먹음직한 빵들을 아직도 눈에 선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그때부터 전 결심했었죠. 크면 빵을 만드는 사람이 되겠다구요. 멋있게 디자인되고 맛도 훌륭한 그런 빵을 만드는 사람 말이에요.”
그녀는 잠시 나를 보다가 침이 마르는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그녀의 얘기는 계속됐다.
“제빵학원을 다니면서 정말 행복했어요. 온갖 빵을 만들었었죠. 어떻게 만들면 정말 맛있고 디자인도 멋있는 빵을 만들 수 있을지 날마다 혼자 연구를 하고는 했어요. 그런데...”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이 끼고 있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생각만큼 잘되지가 않았어요.”
“뭐가요? 맛있는 빵을 만들기 위한 연구가?”
“그래요. 제 딴에는 정말 맛있게 만들어 질 거라고 생각하고 빵을 만들어보면 도무지 내가 상상했던 그런 맛이 나지가 않는 거였어요. 처음에는 별로 실망하지 않았었죠. 그래, 처음이니까, 좀더 노력해서 하다보면 분명히 해낼 수 있을 거야! 실망스런 마음이 들 때마다 전 스스로를 이런 식으로 위로했죠. 곧 나아질 거라고 처음이니까 그런 거라고.”
아마 그렇지 않았겠지. 아니나 다를까.
“하지만 나아지지 않았어요. 어떻게 하든지 나아질 기미조차 보이지가 않았죠. 근본적으로 전... 맛이라는 것을 알지를 못했던 거예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조차도 몰랐었던 거였죠.”
나는 그녀의 얘기를 들으면서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 무척 실망했죠. 저 자신에게 말예요. 그렇지만 포기하기는 싫었어요. 주위 사람들조차 그런 얘기를 들으면 대수롭지 않게 그러면 그만 두면 될 거 아니냐고 말했지만 전 싫었어요. 꿈인걸요. 포기 할 수는 없는 거였죠. 그런 때에... 그 사람을 만나게 된 거예요.”
그 사람?
“그 사람을 만나게 된 건 우연이었죠. 전 중 고등학교 시절부터 아침을 안 먹고 다니는 게 습관처럼 돼 있었는데 그날은 유난히 아침부터 알 수 없는 공복감에 시달렸어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정도였죠. 그래서 무작정 가장 가까이에 보이는 제과점에 들어가서 빵을 하나 집어먹었어요. 그런데 그 순간 머릿속에 뭔가 망치로 치는 듯 한 충격을 받았어요.”
난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로 빵이었어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빵의 맛이었어요. 내가 늘 머릿속으로 만들고 싶었던 빵, 내가 상상 속에서나 느껴보곤 했었던 바로 그 빵의 맛..... 전 한입 베어 물은 그 빵을 손에 쥔 채 멍하니 서있었어요. 그러고 있을 때 그 사람이 다가왔어요. 난 옆에 있는 줄도 몰랐었죠. 그는 내 얼굴을 보고는 씨익 웃으며 말을 건넸어요.”
- 빵의 맛이 괜찮은가요?
- 네... 어떻게...
- 네?
- 어떻게... 이런 빵을 만들 수가 있는 거죠?
- 빵에 관심이 많은가 보군요?
- 전... 이런 빵을 만드는 것을 배우고 있어요.
- 오, 그래요?
- 그런데 이런... 이런 빵은 처음 먹어 봐요. 이 빵은 제가 먹어본 그 어떤 빵보다도 맛 있어요. 최고라고 불러도 모자랄 만큼.
- 하하, 지나친 과찬이네요. 아가씨.
- 아뇨, 정말...
“그 사람은 내 반응에 그다지 놀라지 않는 느낌이었어요. 다만 기분 좋은 듯 조용히 웃고만 있었죠. 그리고는 내게 말했죠.”
- 괜찮다면 아가씨가 만든 빵을 한번 먹어보고 싶군요.
- 아뇨, 전... 정말 형편없는 걸요. 이 빵에 비한다면... 정말...
- 이 빵의 맛이 그렇게 좋은가요?
- 네... 정말로...
- 그럼, 이 빵을 어떻게 만드는지 알려줄까요?
“그 빵의 맛은 정말 대단해서 누구에게나 함부로 알려줄 것 같지 않은데 처음 본 저에게 그걸 알려주겠다고 하니까 전 놀라고 당황했어요. 제 반응을 보고 그가 말했어요.”
- 하지만 그냥 알려 줄 수는 없어요. 조건이 있습니다.
- 조건?
- 그래요.
“무슨 조건이었나요?”
“그 사람의 가게에서 일을 하라는 것이었어요. 이를테면 알바를 해달라는 것 이었죠.”
“아, 예.”
은연중에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했던 나는 좀 맥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잘 된 거네요. 빵을 만드는 법도 알 수 있고, 일을 하면서 돈도 벌수 있고, 일석이조네요.”
나는 유쾌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침울한 채 변화가 없었다.
“물론 일을 한다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었죠. 저도 처음에 그 조건을 들었을 때는 너무나 잘 된 일이라 생각했었고. 하지만...”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 다음이 문제였어요. 거기서 일을 하게 된 그 다음이...”
그렇게 얘기를 하고는 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사람이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실로 다양한 경우의 수를 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21세기에 최첨단을 사는 지금이라 해도 고대 적부터 내려오는 사랑의 본질성은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모험적이고 기쁨과 아픔을 동반하며 때론 위험하기까지 하다. 목숨까지도 위협받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사랑은, 포기하지 못하게 만드는 불가항력적인 매혹의 게임이며 동화이다.
지하로 통해있는 사방이 컴컴한 계단을 한발 한발 내려가면서 난 그런 생각을 했다. 난 최면처럼 내게 속삭였다.
그런 사랑에 넌 지금 빠져버린 거라고. 그리고 그녀는...
카페에서 그녀의 얘기를 모두 듣고 난 후 난 잠시 혼란스러움에 빠졌다. 그렇지만 난 곧 그녀의 말을 믿기로 했다. 왜냐면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지금의 난 아마 그녀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것이다. 그녀에게서 들은 얘기는 그보다 더한 것이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이건 꼭 얘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알고 싶은 게 있어요.”
그녀는 내 얼굴을 쳐다봤다.
“얘기하세요.”
“왜... 이런 얘기를 제게 하는 건가요?”
내말에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문 채 가만히 나를 보기만 하다가 살며시 긴장을 푸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아마도, 그쪽처럼 저도 그쪽을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나는 한동안 그녀의 말을 리플레이 해봤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웃음이 얼굴로 번졌다.
“아, 저는, 그러니까... 제 이름은...”
나의 가슴은 말할 수 없는 설레임으로 가득 찼다.
어둠 속의 계단은 끝도 없이 이어질 듯 하더니 내 발은 어느새 바닥에 닿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얘기해준 대로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아내 켰다. 순간 사방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물체들이 보여 졌다.
그 물체들을 보고서 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사람이에요.”
“사람?”
“인육!”
“인육?”
내가 기겁을 하며 크게 말하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눈앞에 그녀의 말대로 풍경이 펼쳐지니 말로는 들었던 것이지만 난 한동안 마치 도살장의 고기들처럼 매달려있는 시체들을 보고서 너무나 사실 같지 않은 사실에 숨조차 쉬기가 거북했다.
세상에, 내가 여태껏 먹었던 그 맛좋은 빵들의 속에는 바로 인육 덩어리들이 섞여 있었던 것이었다! 아침마다 빵을 굽는 그 향기 속에는 인육을 찌고 조리하는 냄새가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금방 위속에서 치밀어 오를듯한 기운을 간신히 누르고 난 천천히 시체들 사이를 힘들게 한걸음씩 앞으로 내딛었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 끝으로 가면 조그만 문이 나오는데 그 안에 내 ‘함’이 있어요. 그 안에 ‘그것’이 있구요. 그것을 가지고 가야해요. 그렇지 않으면 난 그의 손에서 벗어 날 수가 없어요.”
저 끝으로 보이는 문을 향해 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나는 도저히 옆으로 시선을 돌려 시체들을 살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시체들이 살아나 내 뒷덜미를 잡을 듯한 환상을 억누르면서 나는 겨우 문 앞에 설 수가 있었다.
그래, 할 수 있다. 해야 해. 난 그녀를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일 아닌가? 그녀를 구해내야 하는 거야. 동화 속 왕자처럼.
천천히 손을 들어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생각한 것 보다 의외로 문은 쉽게 열려졌다. 그리고 문이 완전히 열려졌을 때 난 뜻밖의 상황에 어리둥절했다.
거기엔 그녀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엔 의자에 앉은 사내, 언젠가 내가 가게 앞에서 마주쳤었던 빵집 주인 사내가 있었다.
사내는 나를 보고 전에 보여줬었던 사람 좋은 미소를 씨익 지어보였다.
“어서 와요.”
나는 사내 옆에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 또한 나를 보고 차분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22번째로 이곳에 오게 된 걸 축하합니다.”
사내가 말했다.
뭐라고?
“아까 한 가지 하지 못한 얘기가 있었네요. 여기서 내가 하는 일...”
그녀는 살며시 웃어보였다.
나는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문득 빵 굽는 냄새가 내 코로 스며들었다. 아마 내일 아침에도 어김없이 빵은 구워 질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내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귓가로 울려 퍼졌다.
<끝>
'창작 소설 작업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작단편] 비누의 요정 (2) | 2010.07.13 |
---|---|
[자작단편] 동물원 오후의 비 (0) | 2010.06.09 |
[자작소설] G+ (Ep1. 도서관 책 속의 그녀) (0) | 2010.06.09 |
[자작 단편소설] 서스펜스 드라이브 (Suspense drive) (0) | 2010.03.08 |
[자작 단편소설] 산타모니카의 아침 (0) | 2010.03.04 |